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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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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두려워하지 마라!”
초대 그리스도 교회는 주님 부활 대축일을 파스카 성야에서 시작하여 그다음 날 해가 질 때까지 지내다가, 부활의 기쁨을 더 누리고자 부활 팔일 축제를 제정하여 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 또다시 부활을 기념하는 6주간의 전례가 더해져 오늘날의 부활 시기가 완성되었습니다. 부활 대축일의 일자는 해마다 달라지는데, 우리 가톨릭교회는 ① (양력 3월 20일 전후) 춘분이 지나, ② 보름날(음력 15일: 올해는 4월 2일) 다음에 오는, ③ 첫 주일(올해는 4월 5일)을 부활 축일로 지내기로 정하였습니다. 따라서 춘분 다음에 바로 보름날이 오면 부활 축일이 3월 말이 되며, 춘분 이전에 보름날이 지나가 버리면 다음 보름날을 기다려야 하므로 4월 중하순이 되기도 합니다. 유다교는 니싼달(Nissan: 3-4월) 보름날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 올해는 4월 2일이 되며, 프로테스탄트는 (그렇게 가톨릭교회에 비판적이면서도, 따라서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도) 성탄 축일과 부활 축일 등 대축일은 가톨릭의 축일 산정 방식을 따릅니다. 부활 팔일 축제 동안, 우리는 복음 말씀으로 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사, 정확하게 말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등장하시는 대목을 듣고 묵상합니다. 마태오 복음서를 통한 오늘 말씀은, 여인들이 천사를 통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접하고서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천사의 지시대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 여인들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님이 “마주 오시며”, 여인들은 진정한 제자의 몸짓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분을 문자 그대로 붙잡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분이 참으로 살아계심을 확인하며 그분께 희망과 존경을 드리는 몸짓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천사의 지시가 있었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친히 이 여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이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장소이며 동시에 당신의 제자들을 직접 택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구원 사업의 결정적인 순간인 예수님의 죽음과 묻힘과 부활의 시간 속에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제자들, 따라서 용서와 화해의 시간이 필요했던 제자들은 갈릴래아를 향해 지금 출발해야 하며, 거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복음 선포를 위한 조직을 재정비하여 모든 민족을 향해 다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이 출발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꼭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마태 28,16-20). 부활하신 예수님은 끝까지 당신께 희망과 존경을 보였던 신앙인들을 통해 우리를 갈릴래아로 다시 불러 모으십니다. 갈릴래아가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 뵙고 제자로서의 선택이라는 영광과 기쁨을 맛보았던 시간과 장소였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세례의 시간과 장소로 다가옵니다.
오늘 하루, 주님 사랑에 걸림돌이 될 요소들은 모두 끊어버리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했던 세례성사를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부활 신앙을 마음껏 펼쳐나가는, 기쁘고 행복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갔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과 여인들의 만남을 전한다.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8절) 무덤을 떠났다. 부활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사건이기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부활은 죽음을 넘어선 새 생명의 기쁜 소식이기에 ‘크게 기뻐할’ 수밖에 없다. 신앙은 언제나 이 두 감정을 동반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안에 두려움과 기쁨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두려움은 우리의 무력함을 일깨우고, 기쁨은 그분의 은총을 확신케 한다.”(Sermo 232,2)
예수님은 이 여인들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우셨다. 당시는 여성의 증언은 법정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관습과 한계를 넘어 복음을 전하는 이로 여인들을 택하셨다. 이는 부활이 단순한 인간적 논리나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과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진리임을 드러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성들을 먼저 보내셨다. 이는 인간적 약함을 통해 하느님의 강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Homilia in Matthaeum 90,1)
한편,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인들에게 돈을 주며 거짓을 꾸며낸다(12-13절). 이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행위와 연결된다. 돈을 통해 진리를 막아보려는 이들의 시도는 마치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려는’ 어리석음과 같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부활은 역사적으로 확증된 사건이면서 동시에 신앙을 요구하는 신비이다. 적대자들조차 부활을 은폐하려 하였으나, 부활의 진리는 사도들과 증인들을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639-640항 참조) 거짓은 잠시 사람들의 눈을 가릴 수 있지만, 진리는 반드시 드러난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10절)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하신다. ‘갈릴래아’는 제자들의 일상, 그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안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활 신앙을 살아가야 할까?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선택하는 용기: 순간의 안일이나 이익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 ★사랑의 봉사 속에서 부활을 증거하기: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만나듯이, 주님은 우리의 가정, 일터, 공동체 안에서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신다.
부활의 기쁜 소식은 거짓으로 가릴 수 없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며, 진리를 선택하라고 초대하신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의 발을 붙잡고 절하며, 갈릴래아 곧,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을 만나 증거할 때, 우리는 참된 자유 안에서 부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 '삶의 자리에서 믿자!' 오늘 복음(마태28,8-15)은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사화'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십니다.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인 여자들이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러 달려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갑자기 나타나시어 "평안하냐?" 하고 물으십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절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 '갈릴래아는 어디를 말하는가?'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할 갈릴래아는 어디인가?' 그 갈릴래아는 바로 '나의 삶의 자리'입니다. 예수님 활동의 주 무대가 갈릴래아였던 것처럼, 만남과 땀과 관계가 치열하게 엉켜있는 '나의 삶의 자리가 곧 나의 갈릴래아'입니다. 오늘 복음이 '나의 갈릴래아인 삶의 자리에서 제대로 믿고, 제대로 희망하고, 제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강한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믿음이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약함을 봅니다. 성당 안에서만 믿고, 성당 밖인 삶의 자리에서는 믿지 않는,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런 위선을 강하게 질책하십니다.(마태23,1-36 참조)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당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감실 안에만 갇혀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의 삶의 자리에 계십니다. 그곳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증언합시다! 성당 안에서만, 기도할 때만 믿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나의 삶으로 믿도록 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송영진 신부님_<정말로 힘든 일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 자체가...>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마태 28,8-15).>
1)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을 때, 아테네인들은 그 증언을 비웃었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사도 17,32).” <다음에 다시 듣겠다는 말은, 다음에 더욱 자세히 듣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단순하게 ‘듣기 싫다.’에 더 가까운 것으로 해석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체포되어 최고의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 부활에 대한 희망을 말하자, 최고의회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 사실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고,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다 인정하였다(사도 23,7-8).” 그 뒤에 바오로 사도가 로마 총독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을 때, 총독의 반응은 “당신은 미쳤다.”였습니다. “바오로가 이렇게 변론하자 페스투스가 큰 소리로, ‘바오로, 당신 미쳤구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미치고 말았군.’ 하고 말하였다(사도 26,24).” 예수님의 부활을 ‘말’로 증언해서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늘 위험을 무릅쓰고 있습니까? 내가 에페소에서 이를테면 맹수와 싸웠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야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십시다.’(1코린 15,30.32)”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물증’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도들과 신자들의 증언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 증언을 믿는 것은, 그들의 삶과 죽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특히 순교자들의 순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2)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던 경비병들의 이야기는, ‘빈 무덤’은 예수님 부활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는 사제들과 경비병들의 주장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분명해도, 그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가 없습니다. 사제들과 경비병들의 주장도,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라는 제자들 쪽의 주장도, 모두 다 증명할 수 없는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런 논쟁이 생길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 그러니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내고서는,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입니다(마태 27,63-64).”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기꾼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에도 그리스도교를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베드로 사도의 다음 말이 그 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1-12).” <이 말은 산상설교에 있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입니다(마태 5,14-16).>
3) 신앙인은 부활을 믿는 사람이고, 어떤 고난과 시련을 만나도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는, ‘흔들림 없는 모습’ 자체가 부활 신앙의 증언이 됩니다. <만일에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금방 흔들리고, 무너지고, 주저앉아 버린다면, 자기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출처]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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