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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성모성지 이상각 신부님 - AI 시대에 부활은 무엇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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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꽃잎 위에 돋아나는 새 생명 사진 이상각
세상이 너무 평화롭지 못하기에, 우리는 더 절실히 부활을 말해야 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아파도, 마지막 말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새싹이 돋아납니다.
푸르를 수밖에 없는 새싹들이 알렐루야, 알렐루야.
가지에 새싹 돋고 알렐루야, 알렐루야.
햇살이 반짝이고 알렐루야, 알렐루야.
새 빛이 세상을 비춥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프리드리히 슈페 진달래와 히어리, 목련과 개나리가 피어나 세상이 꽃으로 가득한 봄입니다.
지난가을 소나무 밑에 심은 수선화도 노오랗게 피어나 순례자들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봄날의 자연을 바라보며 저도 부활의 기쁨을 생각하게 됩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삶 안에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봄빛 속에 서 있는 십자가, 생명 위에 드리워진 사랑 사진 이상각
그러나 올해 우리가 맞이하는 부활은 마냥 환한 기쁨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아프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때 기술이 발전하면 사람도 함께 성숙해질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가 오고,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가 연결되고, 문명이 더 높아지면 인간도 더 평화로워질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꼭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술은 놀라울 만큼 발전했는데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미움에 사로잡히고, 두려움에 흔들리고, 탐욕에 눈이 멀고, 권력을 위해 사람의 생명을 밀어 넣습니다.
그래서 더 참담합니다.
칼과 창으로 싸우던 시대도 잔인했지만, 이 시대의 전쟁은 더 차갑고 더 멀리서 이루어집니다.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보고, 좌표를 입력하고, 드론을 띄우고, 미사일을 발사합니다.
마치 게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클릭 아래에는 실제 사람이 있습니다.
아들을 잃고 울부짖는 어머니가 있고, 배고픈 아이가 있고, 갈 곳을 잃은 노인이 있고, 무너진 집터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가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인간의 문명인가. 이것이 진보인가.
그러다 보면 마음은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왜 침묵하시는가. 왜 이토록 오래 십자가의 금요일이 계속되는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고통에 대한 쉬운 설명이 아닙니다.
“다 뜻이 있다”는 말로 사람의 눈물을 가볍게 덮어 버리는 대답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오히려 하느님께서 인간의 고통 바깥에 계시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표지입니다.
하느님도 사람의 폭력에 찔리셨고, 미움에 밀려 죽임을 당하셨고, 억울한 침묵 속에서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고통을 설명하는 답이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 곁에 서 계신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부활은 무엇입니까.
전쟁무기가 판을 치고, 더 강한 무기를 만들려 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자랑하는 시대에 부활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는 바로 이럴 때 부활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전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도 아니고, 상처가 곧 사라진다는 말도 아닙니다.
부활은 죽음과 폭력과 광기가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사람이 마지막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마지막 말씀을 하신다는 것, 그 마지막 말씀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세상이 평화로울 때에만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너무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이 너무 잔인해졌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 많이 울고 있기 때문에 더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하자고 호소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전쟁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나쁜 세상을 남겨놓습니다. 전쟁은 정치와 인류의 실패이며, 치욕스러운 항복이고, 악의 세력에 대한 패배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형제임을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하고, 하느님께 전쟁이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전쟁은 언제나 사람을 먼저 무너뜨립니다.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을 잃고, 두려움과 눈물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어 냅니다.
그래서 부활은 더 이상 장식이 아닙니다. 위로의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은 전쟁에 익숙해지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사람을 숫자로 보지 않게 하고, 죽음을 뉴스 한 줄로 소비하지 않게 하며, 눈물 앞에서 다시 떨게 하고, 다시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하는 힘입니다.
부활의 아침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으로 갑니다.
기쁨을 찾으러 간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자리로 갑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울고 있었기 때문에, 끝났다고 생각되는 자리로 갑니다.
그녀의 마음에도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그 돌을 치워 줄까.”
그런데 무덤에 이르렀을 때 돌은 이미 치워져 있었습니다.
그녀가 걱정하던 그 자리에서 하느님은 이미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하냐?”
이 말씀은 지금 세상을 보면 너무 멀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붙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평화가 이미 있기 때문에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평화가 무너진 세상에 다시 평화를 시작하라고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모든 것이 해결된 뒤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만 오는 것도 아니고, 눈물이 마른 뒤에만 오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은 전쟁 한가운데서도, 눈물 한가운데서도, 무너진 삶 한가운데서도 찾아옵니다.
그래서 부활은 죽음의 문화에 맞서는 생명의 저항이고, 무감각에 맞서는 눈물의 저항이며, 증오에 맞서는 사랑의 저항이고, 포기에 맞서는 희망의 저항입니다.
우리 삶에도 돌이 있습니다. 미움의 돌, 두려움의 돌, 포기의 돌, 용서하지 못하는 돌, 절망의 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묻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그 돌을 치워 줄까.
부활의 아침은 조용히 대답합니다.
네가 사랑으로 걸어오고 있을 때, 하느님은 이미 그 돌 앞에서 일하고 계셨다고.
상처 입은 세상 한가운데서도, 눈물 나는 삶 한가운데서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하냐?”
그 말씀은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두려움에 짓눌린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말씀이고, 절망 속에 주저앉은 사람을 다시 걷게 하는 말씀이며, 미움으로 갈라진 세상에 다시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 다시 사랑을 선택하는 것, 다시 평화를 시작하는 것, 바로 그 자리에서 부활은 시작됩니다.
세상이 이렇게 아파도, 전쟁이 끝나지 않아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도, 하느님은 여전히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아무리 크게 말해도, 폭력이 아무리 세상을 덮어도, 마지막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지막 말씀은 언제나 생명입니다.
평화의 모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고통받는 이들의 어머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십자가 아래 서 계신 어머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희망의 어머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꽃잎이 길이 되는 봄날, 우리는 그 위를 걸어갑니다 사진 이상각
위의 글은 이상각 신부님의 블로그 글입니다.
[출처] AI 시대에 부활은 무엇입니까|남양성모성지 이상각 신부 블로그https://blog.naver.com/rsony4u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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