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9일 (일)
(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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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28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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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3-28 ㅣ No.188754

이병우 신부님_"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11,53) 
 
'부활의 원조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11,45-56)은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말씀'입니다.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표징을 비롯하여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다른 표징들 때문에 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한 유다 지도자들이 최고 의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최고 의회의 결정이니 이제 실행시키는 일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큰 결정적 순간에 가야파가 함께 합니다. 그는 그해의 대사제로서 최고 의회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11,49) 
 
대사제 가야파의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민족 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고백하는 이들을 다시 부활시키시려고 돌아가십니다. 
 
오늘 독서(에제37,21ㄴ-28)가 전하는 메시지는 '희망'입니다. 완전 멸망한 바빌론 유배지에서 활동한 에제키엘 예언자가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활을 알리는 희망'입니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에제37,21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부활을 위해 맺으신 계약의 표징은 '성전'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넘어 우리와 모든 민족들을 부활시키시기 위해 맺으신 새 계약의 표징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부활의 원조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보다 더 큰 고난의 길이 없고, 우리의 부활을 위해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난과 고통보다 더 큰 수난과 고통은 없습니다.
이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믿는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다시 부활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의논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기득권과 자기 보존의 욕망 때문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해석하며, 지도자들이 민족의 안위와 성전을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자기들의 자리와 권력만을 염려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민족의 멸망을 걱정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자리와 이익을 잃을까 두려워했다.”(Tractatus in Ioannem 49,7) 이는 곧 하느님의 계획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자기 이해관계와 안전을 우선시한 인간적 태도의 단적인 모습이다. 
 
대사제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50절)라고 말한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를 ‘대사제로서 무의식적으로 한 예언’이라고 설명한다. 교부들은 이 구절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인간의 악한 의도까지도 구원 계획 안에서 사용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주석한다. “하느님은 때로 악인의 입술을 통하여도 진리를 드러내신다. 가야파는 자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지만, 그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인류 구원의 신비를 미리 선포하고 있다.”(Commentarium in Ioannem, XIX, 16) 따라서 인간적 음모와 불의의 말조차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가야파의 말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보존을 위한 희생을 의미했지만, 성경은 이를 보편 구원으로 확장한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 한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흩어진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희생이었다. 그분의 피는 교회의 일치를 낳았다.”(De catholicae ecclesiae unitate, 7) 교회 헌장에서도 가르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당신 안으로 모아들이시며, 새 백성, 곧 하느님의 백성을 창조하셨다.”(9항 참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경고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 우리가 그들의 어리석음을 보며, 우리의 삶에서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Homilia in Ioannem 65,1)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으로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을 본 지도자들은 오히려 죽음의 음모를 꾸민다. 신앙이 없는 마음은 기적조차도 믿음을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을 키울 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음모와 불의 속에서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52절) 돌아가셨다. 사순을 지내는 우리도 그분의 희생 안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이익과 체면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사랑의 계명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하겠다. 

 

김건태 신부님_비운의 역사적 결의

 

 

공관복음과 비교해 볼 때요한복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복음서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부분이(21개의 장 가운데 11-21수난과 죽음과 부활 기사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입니다이 단원은 죽음을 향하시는 예수님(11,1-12,50), 최후 만찬과 고별사(13-17), 수난과 죽음 기사(18-19), 그리고 부활 기사를(20-21잇따라 나열합니다물론 여기서도앞선 단원과 마찬가지로말씀으로 대화하시며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자주 만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수난과 죽음과 부활 기사의 첫 부분(11,1-12,50) 가운데예수님이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을(11,1-44) 목격하고서소위 최고 의회’ 구성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장면을 소개합니다흔히 최고 의회로 번역하는 산헤드린은 본디 유다 백성의 최고 종교기관으로서 대사제가 의장직을 맡고칠십여 명의 의원을 구성원으로 두고 있었는데의원들 대부분은 사두가이였고 더러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이들이 예수님을 처형하기로 결의한 계기는 예수님이 행하신 저렇게 많은 표징” 때문이었습니다예수님은 분명 믿음을 북돋워 주기 위하여 수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그것이 바로 격렬한 반대의 이유가 되며끝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궁색한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저렇게 많은 표징에 대한 대책이 절실했습니다: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무엇보다 먼저 그들이 그동안 누려온 기득권에 대한 위협을 경계해야 했으며백성을 선동하여 결국 성전이 파괴되고 민족이 절멸되리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여기서 그해 산헤드린의 의장직을 맡고 있던 대사제 카야파의 발언이 예언적 가치를 지니는 역설을 확인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카야파는 예수님을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보고서그분은 그 많은 표징으로 사회적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기에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분을 제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그러나 훗날 제자들 또는 복음 저자들은 모든 것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 되새겨 보는 가운데카야파의 발언이 지니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냅니다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확고히 하시고성부의 이끄심에 따라 세상 곳곳에서 모여드는 이들을 하나의 백성으로 모으실 것이라는 예언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전례적으로 내일 주일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곧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날입니다그러나 그 예루살렘은 불신과 배반과 반대와 박해로 예수님을 맞아들여 죽음의 길로 안내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살아온 사순시기들을 돌이켜보고 마음을 가다듬어주님의 마지막 고통의 길곧 구원의 길에 함께하겠다는 다짐을 굳건히 하는신앙인다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요한 11,45-54)”

1) 48절의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라는 말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로마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라는 말은, 로마제국이 반란을

진압하려고 군대를 보내면 유대교는 망할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도 멸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비록 로마제국의 식민지이긴 했지만,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회 의원들은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인지,

가짜 메시아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또 속마음으로는 민족의 안위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진짜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최고의회를 비롯해서 지도층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기득권을 누리면서 사는 것에 만족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카야파가 한 말은, 민족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는, 뜻으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는 것보다”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그자를 죽이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다.”입니다.

그의 말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고민하지 말고, 그냥 그자를 죽입시다.”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예수님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자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은 기득권 유지를 방해하는

걸림돌일 뿐이니 그냥 제거하자는 말입니다.

2) 51절과 52절은, 복음서 저자의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살인자들 쪽에서 보면,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살해당한 일이지만, 예수님 쪽에서 보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 사람들, 즉 이방인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일입니다.

‘모든 사람’에는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들도 포함됩니다.>

3)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은,

그 자체로 불법인 일입니다.

재판도 없이 사형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생명을 주려고 오신 메시아를 배척한

일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 자신들의 영혼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과 같습니다.

최고의회가 로마제국을 두려워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몰랐더라도, 그렇게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것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자체도

‘큰 죄’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려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라고 생색내면 안 됩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 통곡하는 여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루카 23,28ㄴ.31)”

성주간을 지내는 신앙인들의 기본자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 가운데에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끝까지 자신의 기득권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자들은 결국 서기 70년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할 때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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