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6일 (목)
(자)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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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_ 진실한 사람만 믿을 수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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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3-24 ㅣ No.18867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신비로운 선언을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요한 8,28-29) 여기서 "내가 나다"라는 표현은 그리스어로 '에고 에이미(Ego Eimi)', 곧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선언을 들은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왜일까요? 예수님께서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 즉 '순종'을 하기에 아버지가 당신의 모든 것인 신성을 아들에게 주셨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최종 목적지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아는 것을 넘어, 그분께 순종하는 우리 역시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재창조되지 않는다면 믿음은 공허한 지식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신성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내 모든 것을 내어줄 만큼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나를 다 주지 않으니, 하느님이 순종하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다 주신다는 사실도 거짓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는 '목숨을 건 순종'이 어떻게 상대방의 모든 것을 끌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삼국지'의 장수 조운은 주군의 혈육인 아두를 구하기 위해 홀로 조조의 100만 대군 속으로 뛰어듭니다. 이는 주군의 가문을 보존하라는 절대적 순종이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조운이 아기를 바치자, 유비는 아기를 바닥에 팽개치며 외칩니다. "이 아이 하나 때문에 내가 귀한 장수 하나를 잃을 뻔하였구나!" 유비는 자신의 혈육보다 조운의 목숨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조운이 목숨을 걸고 순종했을 때, 유비는 그에게 자신의 아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온 마음과 권력을 다 내어주었습니다. 인간도 자신을 따르는 이에게 모든 것을 주려 하는데,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순종을 보시고 당신의 신성을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출처: 나관중, 『삼국지연의』 제41회) 예수님의 순종을 보고 자신도 순종하여 하느님의 에너지를 받은 완벽한 사례는 성녀 베르나데트입니다. 1858년 루르드, 성모님께서는 어린 베르나데트에게 "가서 흙탕물을 마시고 풀을 뜯어 먹어라"라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비웃었지만, 그녀는 자존심과 이성을 꺾고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기적의 샘물이 솟아났고, 더 놀라운 표징은 그녀 자신에게 일어났습니다. 1879년 선종한 그녀의 시신은 1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패하지 않은 채 생생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했기에, 주님은 당신의 썩지 않는 신성의 에너지, 그 영원한 생명력을 그녀의 육신에 가득 채워주신 것입니다. 순종하는 이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다는 살아있는 표징입니다(출처: 르네 로랑탱, 『루르드의 베르나데트』).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 명백한 표징들을 보고도 믿지 못할까요? 왜 내가 순종하면 하느님이 된다는 사실을 의심할까요? 요한 복음은 그 이유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은 찾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요한 5,44) 우리가 믿지 못하는 이유는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함의 문제'입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 노력합니다. 그 기초는 언제나 '거짓말'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아닌데 하느님인 척, 거룩한 척, 잘난 척 포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거대한 거짓의 탑을 쌓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순종하여 무언가를 받는다는 원리를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믿게 되면 내 영광의 탑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 (1984)의 살리에리는 평생 "주님, 저를 위대한 작곡가로 만들어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한 위장이었습니다. 그는 모차르트의 악보를 보며 그것이 하느님의 음성 그 자체임을 전율하며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십자가를 불태웁니다. 하느님이 자신이 아닌 모차르트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자신의 영광'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신성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그 영광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믿음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이는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 하기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느님이 된다는 사실을 절대 믿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믿음은 자신의 삶과 정반대되는 위협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피터 섀퍼 원작, 영화 '아마데우스' 1984) 진실함은 자기 영광의 기초인 거짓을 무너뜨립니다. 솔직한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라 부족한 피조물임을 인정합니다. 나를 하느님으로 포장할 필요가 없으니, 나를 하느님으로 만들어주실 진짜 하느님께 순종할 준비가 됩니다. 그래서 솔직한 사람은 결코 자기 영광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돌에 맞아 죽을 운명이었고, 자신의 영광을 챙길 수 없는 비참한 처지였기에 오히려 가장 진실해질 수 있었습니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녀는 이미 죄와 벌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님의 신성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내가 진실한 사람이 되어 내 영광을 버리고 주님께 순종하십시오. 그때 우리는 "내가 나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그 신성한 에너지가 내 안에서도 용솟음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교부 성 이레네오(St. Irenaeus)는 『이단 반박』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조건을 취하신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신성을 입게 하려는 것이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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