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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03월 22일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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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죽음이 아니라 삶 [말씀] ■ 제1독서(에제 37,12ㄹ-14) 바빌론 유배시기 동안 수많은 사람이 유배의 땅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살아남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미래에 대한 전망은 없어 보였습니다.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었으나, 유배지에서 예언자로 불림을 받은 에제키엘은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합니다. 환시 속에서 그는 뼈들로 가득 찬 골짜기에 서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자 뼈들이 일어나 살과 살갗을 갖추어 되살아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당신 백성을 되살리실 것이며, 당신 구원의 능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 제2독서(로마 8,8-11) 사도 바오로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육’은 자기 욕망에 매여 닫혀 있는 세속적인 인간을 가리키며, ‘영’은 하느님 영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의 형태를 말합니다. 영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으며, 이웃 형제들과 세상과 의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새로운 생명은 결코 파괴되거나 소멸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 복음(요한 11,1-45) 복음저자 요한이 전하는 일곱 가지 기적 이야기 가운데 마지막에 자리하고 있는 ‘라자로의 부활 사건’은 우리를 주님의 부활로 이끄는 탁월한 표지 역할을 합니다. 라자로를 죽음에서 건져내심으로써 예수님 자신은 죽음에 빠져드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몸짓은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부활은 미래의 것이기는 하나 라자로 안에서, 그리고 세례받은 신자들 안에서 이미 실현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 죽음이 육적이든 영적이든 죽음을 지배하는 능력을 갖추고 계심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새김] 삶의 조건들이 나날이 악화하고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 가중되어 갈 때마다 사람들은 흔히 ‘이건 더는 사는 게 아니다’라고 호소합니다. 그렇다고 삶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그 조건이 어떠하고 헤쳐나가야 할 고통의 무게가 어떠하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들, 나아가 우리 자신, 우리의 습관, 욕망, 두려움이라는 내적인 환경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덤처럼 우리를 죽음의 세계로 몰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무덤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될 대로 돼라’ 하는 체념에 빠지거나, 혹은 ‘죽는 편이 더 낫다.’ 하는 생각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의 죽음은 세상사 부조리에 찍힐 최후의 낙인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들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역설합니다. 다만 그 삶이 진정한 삶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삶, 그러나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삶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새로 태어나고 신앙을 사는 신앙인들에게 은총으로 이미 주어진 삶입니다. 신앙인은 성령의 빛을 받아 자기 자신을 짓누르거나 그 안에 갇혀 있는 껍데기에서 벗어나, 빛을 향하는 삶, 곧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지향하며, 이러한 삶으로 언제나 죽음을 뛰어넘는 능력을 선사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하신 주님을 따라, 이번 한 주간 사람은 물론 자연을 사랑하는 삶으로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는, 의미 있는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 “라자로를 살리시다.” 1. 사순 여정의 절정: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사순절의 복음들은 점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드러낸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생수를 주시는 분”(요한 4장)으로, 태생 소경을 치유하시며 “세상의 빛”(요한 9장)으로, 그리고 오늘 라자로의 부활에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된다. 물과 빛은 모두 생명의 표징이며, 이 모든 상징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그분은 단지 생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25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 안에서 계시하신다. 교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생명의 주님’이시다. 그분 안에서 죽음은 의미를 잃고, 생명이 새로운 형태로 시작된다.”(1002항) 사순 시기의 여정은 단순히 고행과 슬픔의 시간이 아니라,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나아가는 파스카 여정이다. 오늘 라자로의 부활은 이 여정의 절정이며, 부활의 약속을 미리 보여 주는 상징이다. 2. 라자로의 병: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사건 예수님께서는 친구 라자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4절) 이 말은 단순히 라자로의 병이 고쳐질 것이라는 뜻을 넘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는 깊은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주님은 고통을 멀리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고통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죽음을 미루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힘을 보여 주시려 지체하신 것이다.”(Homilia in Ioannem 62,1) 라자로의 부활은 단지 한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 기적이 아니라, 곧 다가올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예형”(prefiguration)이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심으로써, 자신이 곧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주님임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이라는 더 큰 영광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생명을 향한 승리의 문이다. 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믿음의 고백 오늘 복음의 정점은 예수님의 선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이 말씀은 단순히 미래의 부활을 약속하는 선언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자는 이미 지금 여기서 부활의 생명 안에 산다는 계시이다. 이 신앙을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묻는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26절)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마르타의 이 고백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태 16,16)과 나란히, 요한 복음 전체의 중심 고백으로 평가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마르타의 믿음은 무덤을 열었다. 믿음이 없었다면 돌은 여전히 닫혀 있었을 것이다. 믿음은 죽음을 깨우는 열쇠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49,15) 교리서는 신앙을 단순한 동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참여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일치하여, 그분의 생명 안에 참여하는 것이다.”(987항) 송영진 신부님_<“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요한 11,11-15)”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11,43-44).”
1) 요한복음 5장에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요한 5,2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요한 5,25-26).”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8-29).”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은, 요한복음 5장의 말씀들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신 일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은 부활이며 생명이신 분”,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이고,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희망하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죽음에 대한 공포, 사별에 대한 슬픔, 죽음에서 비롯된 절망감과 허무감과 무력감 등에 짓눌려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찾는 것이 바로 ‘종교’이고, 그런 것들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실 분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죽음에서 영원히 해방시켜 주신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1테살 4,13-14).”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1테살 5,9-11).” 신앙생활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기 위해서, 즉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죽음에도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3) 라자로의 이야기에서, “라자로가 잠들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죽음은 ‘긴 잠’과 같은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라는 말씀은, ‘긴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는 일은, 즉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당신만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라는 말씀은, “죽은 라자로를 내가 살리겠다.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라자로가 죽을 때 내가 거기에 없었던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너희가 믿게 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기쁘다.” 라는 뜻입니다.
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죽은 사람들을 살리는 권한과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믿는 대로 사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곧 삶’입니다.> 43절의 ‘큰 소리’ 라는 말은, “하느님의 권위와 권능이 있는 음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는 말은, “하느님으로서 명령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라자로 자신이 스스로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나왔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구원’이란, 사람을 살리려는 ‘주님의 의지’와 살고 싶어 하는 ‘사람 쪽의 의지와 능동적인 응답’이 합해져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이 살고 싶어서 하는 생활이고, 나를 살리려는 주님의 부르심에,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사순 제5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이병우 신부님_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오늘 복음(요한7,40-53)의 제목은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이라는 제목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고된 예언자'로 여기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래도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때,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 나무에 달려 돌아가시는 때가 가까워지자, 점점 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관심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더 드러나면서 구체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예레11,19)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정말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단순해 보이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나를 살리시고 부활시키시는 구세주(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믿음이면, 분명 나의 행동에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어제 함안성당에서 판공성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신자에게 훈화로 이런 말을 나누었습니다. "나의 신앙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신앙이 되게 하십시오. 형식에 치우친 의무적인 신앙생활, 그렇게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지만 말고, 오히려 삶에 자리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을 닮아 있는 살아있는 믿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나의 신앙이 되도록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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