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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21일 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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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믿음과 불신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이 의견의 차이를 보이고 때로 갈라서기까지 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그러한 현실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예수님 당시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같은 하느님을 섬기고, 같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동일한 현실이 목격된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스라엘 순례 중,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예루살렘의 ‘주님 무덤 기념성당’에 들어가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 성당 내부 오른쪽 (언덕처럼) 높은 곳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과 십자가가 세워져 있던 곳이 있고, 성당 중앙에는 묻히시고 부활하신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데,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에, 나아가 정교회 사이에서도 지분 문제로, 구체적으로는 좁은 공간에서의 영역 문제로 다툼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러한 현실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분열을 가르치거나 조장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열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인간 공동체가 예수님의 말씀 주제인 정의와 진리와 평화를 거부하면 할수록 분열의 정도는 그 깊이를 더해 갈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그대로 실천하려는 자세와 노력으로 참 행복 곧 구원에 다가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지 못하거나 정반대의 방향을 택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하여 분분했던 군중의 반응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또는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하며 예부터 전해 내려온, 그래서 그렇게 확신하며 기다려온 메시아와 차이가 있다는 편협한 판단에서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거부합니다. 거부하는 세력 가운데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빠질 수 없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에게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라고 힐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경비병들, 성전의 공공 질서유지를 책임진, 그래서 아마도 교육 정도는 그리 높지 않았던 이 사람들이 가장 의롭고 가장 빛나는 견해를 밝힙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말씀에 권위가 있으신 분, 권위가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그분은 말씀하시는 대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천명하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 속에는, 그분은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수석 사제들이나 바리사이들, 곧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던 당시의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여러 차례 질책하셨듯이,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말 잔치에 몰두했던 지도자들, 특히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을 ‘참 예언자’ 또는 ‘메시아’로 보고 있는 모든 이는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니코데모가 지적하고 있듯이, 율법이 명백하게 적시하고 있는 규정조차 무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바리사이들이니, 자신들이 바로 ‘저주받은 자들’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말씀과 행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쳐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는,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시대처럼, 이 세상이 불의와 거짓과 다툼으로 말미암아 구원으로부터 멀어져만 가는 상황 속에 놓여 있을 때였으며,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정의와 진리와 평화가 다스리는 세상이 정착할 수 있도록 우리가 힘써야 할 때입니다.
오늘 하루, 의롭고 진실한 마음을 간직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 다툼이나 분열이 아니라 평화와 일치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앞장서는, 가슴 뿌듯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둘러싼 논쟁을 본다. 어떤 이는 그분을 모세가 약속한 예언자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리스도라 말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41절)라며 배척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적 기준과 세속적 지식에 의존하여 그리스도를 판단하는 태도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묵상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나오셨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한 자들은 그분을 갈릴래아 출신이라고 여겼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36,3) 즉, 사람들은 외적인 것만 보고, 실제로는 그분의 참된 정체성을 알지 못했다. 성 예로니모 역시 같은 본문을 주석하면서 말한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Prologus in Isaiam) 유다인들은 성경을 연구한다고 했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지 못했다. 또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전 경비병들의 고백,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46절)라는 말은 오리게네스가 말하듯이,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본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신적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셨기 때문이다.”(Commentarium in Ioannem, XIX, 12)
교회는 예수님이 “율법과 예언서 전체를 성취하신 분”이심을 가르친다(교리서, 577-582항 참조). 그러나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권위에 안주하여 그분을 배척했다. 니고데모가 던진 말처럼(51절), 하느님을 올바로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분의 행적을 보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교만과 자기 확신 안에 머문다면, 결국 하느님을 거부하는 길로 가게 된다.
이 사순 시기에 우리도 “내 기준과 내 지식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 벽은 교만, 편견, 자기 확신으로 쌓여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받아들여야 할 구세주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성경과 성체를 함께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영혼을 양식으로 채우며,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한다.”(Enarrationes in Psalmos 103,1,2) 즉, 성경은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는 눈을 열어주고, 성체는 그리스도와 실제로 하나 되게 하는 은총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순 시기에, 우리 마음을 낮추어 경비병들처럼 고백하자. “주님, 당신처럼 말씀하시는 분은 없습니다.” 그 고백 안에서 그리스도를 참되게 만나고, 부활의 은총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리가 없지 않은가?."(요한7,30ㄴ) '나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오늘 복음(요한7,40-53)의 제목은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이라는 제목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고된 예언자'로 여기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래도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때,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 나무에 달려 돌아가시는 때가 가까워지자, 점점 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관심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더 드러나면서 구체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예레11,19)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정말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단순해 보이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나를 살리시고 부활시키시는 구세주(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믿음이면, 분명 나의 행동에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어제 함안성당에서 판공성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신자에게 훈화로 이런 말을 나누었습니다. "나의 신앙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신앙이 되게 하십시오. 형식에 치우친 의무적인 신앙생활, 그렇게 미사에 참례하고 기도하지만 말고, 오히려 삶에 자리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을 닮아 있는 살아있는 믿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나의 신앙이 되도록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입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송영진 신부님_<“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7,40-53).”
1)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라는 말은, “저희는 그분의 말씀에서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1-22).” 이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자기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껴서 몹시 놀랐다는 뜻입니다. 성전 경비병들과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말’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끼고 그 힘에 자기들이 압도당하게 되자 놀란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 또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놀라기만 하고 끝났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들 가운데에서 몇 명은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살아 계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고, ‘우리를 살리는 힘이 있는’ 말씀입니다.>
2) ‘니코데모’는 요한복음 3장에서 등장했었던 사람입니다.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의회 의원이었다.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한 3,1-2)” ‘바리사이’이며 ‘최고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48절의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라는 바리사이들의 말은 ‘틀린 말’입니다.
3)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라는 니코데모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고,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본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4)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출생지 같은 것만 문제 삼아서 예수님을 안 믿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며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예수님을 ‘가짜 메시아’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는 조작되었다고, 또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사도들의 그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족보나 출생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어서 ‘나 자신’이, 또 ‘내 인생’이 얼마나,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현세적인 소원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새 인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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