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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ㅣ여행후기

서울대교구 가두선교순례단(인준 단체) / 3월 14일 성지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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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두선교순례단 [stirene] 쪽지 캡슐

2026-03-15 ㅣ No.1931

 

 

서울대교구 가두선교순례단은 한국교회사 연구소 연구위원이신 김학수 바오로 신부님과 함께

참회와 속죄의 성당, 갈곡리 성당, 신암리 성당, 황사영 묘, 성 남종삼 묘를 순례하였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 – 순교 사적지, 민족 화해 센터>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로 111에 자리하고 있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과 민족 화해 센터는 한반도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교육하는 장(場)을 마련하자는 김수환 추기경의 제안으로 1990년경부터 건립이 준비되었고, 성당은 2008년에, 센터는 2014년에 완공되었다.

한옥 양식인 성당의 외형은 평안북도 신의주 진사동 성당을, 내부는 함경남도 덕원의 베네딕도 수도원의 한국 전쟁 이전의 모습으로 각각 재현하고 있다.

민족화해센터는 평양 외곽 서포에 있던 메리놀 선교회 본부 건물을 복원하였다.

제단의 반구형 모자이크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왕좌에 앉아 ‘평화’가 적힌 책을 펼치신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 모자이크는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가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평양 만수대 창작 작가 7명이 중국 단둥에서 40일간 공동 작업하여 이곳으로 옮겨와 5개월여에 걸쳐 부착한 작품으로 남북 합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2013년 부터 매주 토요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지향으로 기도회와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오늘이 536차 토요 기도회가 봉헌된다고 한다.

성전 뒤편에도 역시 모자이크로 하느님의 종 ‘제6대 평양교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초대 함흥 교구장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대수도원장’의 문장이 부착되어 있다.


김학수 바오로 신부님 성지에 대해 보충 설명해 주심.

현지 사무장님의 성지 해설

 

민족화해센터 메리놀의 성모님, 독일의 알퇴팅의 검은 성모님, 라방의 성모님

 

<갈곡리 성당 – 순교 사적지>

갈곡리는 칡이 많아 칡의 계곡으로 불렸고, 우리말로 칡울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칠울 공소’라 불렸다.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인근 우골에 정착하였던 신자들이 많아져, 1896년 세 가족이 칠울로 옮겨, 옹기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며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다.

이곳은, 하느님의 종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한국인 최초 수도 사제, 1950년 10월 5일 순교)와 그의 누이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50년 10월 17일 순교)가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를 비롯하여 20여 명의 사제 및 수도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현재 성당은 공소 강당이 전쟁으로 소실된 뒤, 미 해병대 군종 신부 마 에드워드 신부님의 도움과 한국 해병대 김창석 타대오 신부님의 협조로 건립되었다.

갈곡리 성당은 하루 세 번 6시, 12시, 그리고 저녁 6시 종탑에서 종소리가 50여 년 동안 울려 퍼지고 있다.

십자가의 길과 미사 그리고 점심을 함께하였다.

 

 

 

 

<신암리 성당 – 순교 사적지>

신암리는 조선 말기 박해를 피해 형성된 교우촌이다.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나 1953년~1955년까지 신자들의 노력과 영국 군인들의 도움으로 공소를 재건하였고, 2007년에 공소 설립 100주년을 맞아 성전을 신축 봉헌하였다.

피정 공간으로 성당이 개방되어 있고, 성당 입구에는 성당 앞 마당에 있었던 전나무로 제작한 묵주 품은 전나무 십자가가 예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하느님의 종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베네딕토회)는 1915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암리에서 태어났다.

이춘근 신부는 서울교구 사제로 1939년 6월 24일 사제 서품 받은 뒤 사목활동을 하던 중 수도 생활에 매력을 느껴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948년 10월 평양 대목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가 사제를 청하자 루치오 로트 원장 신부는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를 평양으로 보냈다.

그는 평양 서포 본당 주임 신부 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 신부로 활동하던 중 공산당의 횡포가 심해지자 평양 외곽의 순안 공소로 피신해 신자들을 돌보았다.

1950년 10월 5일 평양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와 동료 37위의 일원으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조선 후기의 박해 상황과 대비책을 적어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고 준비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 알렉시오 묘 순례

황사영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명문 대가였다. 어머니 이윤혜는 평창 이씨로, 이승훈의 일가인 진사 이동훈의 딸이었다.

정조 임금은 그의 비상한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불러들여 얼마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친애하는 표로 손목을 잡기까지 하였다. 이에 황사영 알렉시오는 그때부터 왕의 손이 닿은 영광을 가진 손목을 보통 사람은 마구 만질 수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손목을 명주로 늘 감고 다녀야 하였다고 한다.

어린 나이로 진사가 되어 일찍이 명성을 얻은 그는 정약용의 이복 형 정약현의 맏딸 정명련(난주) 마리아와 혼인한 그는 천주교를 접하게 되고, 처 고모부 이승훈 베드로에게 교리서를 얻어 보고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최인길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서양 사람들이 살고 있는 천주당에 직접 가 보고 그들을 만나 보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천주교를 세상을 구하는 양악으로 또는 정도로 인식한 그는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건질 수 있는 길은 천주교를 신앙하여 나라를 혁신시키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선교에 온 힘을 기울였다.

황사영은 교리에 밝아 교회 내애서는 그를 ‘성학고명(聖學高明)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고, 강완숙도 교리에 가장 밝은 사람 가운데 하나로 황사영을 꼽을 정도였다.

정약현의 첫 부인은 이벽의 누나였다. 이벽의 누나는 딸 셋을 낳고 죽었는데, 큰 사위가 황사영이고, 둘째 사위는 후에 정언을 지낸 홍영관이었으며, 셋째 사위는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였다.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발각되고 황사영은 체포되어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오명을 쓰고 대역 죄인이 되어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을 받는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이다.

이 사건으로 홀 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 정명련은 제주도로 2살 아들 황경헌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가산은 몰수되고 대역 죄인이라하여 족보에서 제외했다고 한다.

황사영의 묘는 180년 동안 찾지 못하다가 1980년 후손들과 학자들이 현재의 묘를 발견하여, 묘역이 조성되었다.

황사영 순교자는 현재 시복 절차가 진행 중에있다.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

이곳은 남종삼 요한 성인과 그 가족 묘소로, 1968년에 성인의 손자 남상철이 가족 묘역으로 조성하였다.

길음동 성당 울대리 묘지 정문에서 왼쪽으로 표지석을 따라 길을 오르면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역‘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는 남종삼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부친 남상교(아우구스티노)와 부인 이조이(필로메나)와, 창녕으로 유배 갔던 막내아들 남규희의 묘가 있다.

전주 진영에서 순교한 장자 남명희의 묘는 없다.

남종삼 성인은 ’승지‘라는 직책으로 103위 성인 가운데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던 분이다.

원래 생부는 남탄교이나 장성한 뒤 슬하에 아들이 없던 백부 남상교의 양자로 들어갔다.

남상교는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로 충주 목사와 돈녕부 동지사를 지냈다.

남종삼의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1863년 말경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통상을 요구하자, 남종삼 성인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프랑스의 선교사들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물리치자는 ’이이제이 방아책‘을 건의하였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주교와 만남을 시도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고 그 후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지게 되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반대파 대신들의 정치적 공세가 이어지고 있었고,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가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 등이 전해지면서 태도를 바꾸어 쇄국 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통해 정치적 문제를 풀어가고자 하였다.

이에 1866년 2월부터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사형 선고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선포하면서 병인박해가 시작되었다.

병인년에 시작된 박해는 흥선대원군이 하야하는 시점인 1873년까지 약 8년간 지속되었다.

남종삼 성인은 3월 1일 고양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당시 의금부에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홍봉주 토마스를 비롯해 여러 선교사와 신자들이 투옥되어 있었다.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6회에 걸친 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을 지켰을 뿐 아니라 천주교가 정도라는 호교론을 펴 나갔다.

남종삼 성인은 1866년 서소문 밖에서 모반 주도의 죄목으로 참수형을 받고,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베르뇌 주교, 다블뤼 주교와 함께 참수되었다. 향년 50세였다.

남종삼 성인의 시신은 박순집에 의해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1968년 시복식을 앞두고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순교 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소인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성인의 유해 일부는 바티칸 교황청 예부성성에도 보내졌고, 일만위 순교자 현양 동산 내 성 남종삼 기념관과 갑곶 순교 성지에도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서울대교구 가두선교순례단 4월 11일 순례 모집 안내


날짜 : 2026년 4월 11일(토)

출발 장소 : 지하철 2,3,5호선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 오른쪽, 광희문성지 맞은편

출발 시간 : 오전 7시 50분까지 집결(오전 8시 출발)

안내 및 신청 : 010-9016-6139. 단장 전병성 그레고리오

순례지 : 춘천 죽림동 성당, 소양로 성당, 화천 성당, 김화 성당(김성 교우촌)

- 성지 순례 코스와 날짜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 회비 : 6만원(교통비, 중식, 간식 포함) / 입금자 이름과 함께 회비 라고 명시 바랍니다.

(농협 : 312-0233-5929-31 / 전병성)

- 준비 사항 : 미사준비, 묵주, 필기구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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