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눈이 침침하고 사물이 흐르게 보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는 분의 권유로 눈 검사를 받았고, 검사 결과 백내장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이내 백내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잘 보이지 않아 안경을 쓰고 살아왔기에 눈의 소중함을 잘 압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소경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었고, 그런 상태로 태어났기에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없었으며 단지 그러려니 하면서 자신의 보지 못함을 받아들이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도 없었고 주님께 다가가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먼저 눈먼 이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9,2)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당대의 모든 사람에게는 헤어나지 못한 그릇된 고정 관념, 곧 죄의 인과응보를 믿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지금 겪고 있는 육체적인 질병은 바로 본인 혹은 가족들의 죄의 결과인 벌이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태중 소경과 그의 부모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태중 소경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영적인 측면에서 ‘눈뜬장님’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삼아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9,3)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을 통해서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시어” (루4,18) 여기 사람들 가운데 당신이 함께 계시며 일하심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먼 이의 치유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9,6)라고 명하심으로 완결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일반적인 치유 방법이었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행동하신 것이지만, 이 모든 일은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하심이고 행하심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신 구원의 행위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당신 또한 눈먼 이를 치유하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신 분’으로 소개하는데 파견되신 분이 눈먼 이에게 ‘실로암’(=‘파견된 이’라는 뜻)에 가서 물로 씻음으로 앞을 보게 되었다는 의미는 바로 당신이 이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9,5)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로써 지금껏 눈이 멀어 마치 잠자는 상태에 있었던 그를 깨어나게 하고 죽음과 같은 어둠에서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에5,14참조)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태중 소경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에5,8)라고 역설하시면서 스스로 보고 왔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제대로 보고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빛인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자식에서 빛의 자녀가 되었음을 환기시키며,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5,8)라고 분발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태중 소경의 눈뜬 날이 안식일이었고, 안식일에 진흙을 만지는 행위는 안식일 법을 어긴 행위였었기에 바리사이들에겐 충격이었고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9,16참조)라는 의문을 가진 채 진상을 조사한답시고 눈뜬 이와 그의 부모를 불러 추궁하고 예수님에 관한 생각을 바꾸도록 강요하였습니다. 하지만 눈뜬 이는 예수님을 “예언자이며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다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9,17.33)하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이처럼 때론 자기 안에 갇혀 살아왔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늘 자기식대로 보고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기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단죄하고 심판하듯이 그 눈뜬 이를 질책하고 밖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정작 치유가 필요한 부류는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뜬장님이었던 것입니다.
눈 뜬 이는 비록 바리사이파 사람들로부터 내쫓김을 당했지만,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자, 그에게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9,35)라고 묻자, 그는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9,36)라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굳건한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9,37) 고 말씀하시자, 이내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9,38)하고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로써 그가 단지 육안肉眼만을 뜨게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 영안靈眼까지 뜨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도 단지 육적인 눈뜸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주님으로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의 눈뜸을 통해서 ‘빛의 자녀로 온전히 새롭게 거듭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태중 소경의 치유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9,39)라는 말씀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이란 바로 치유 받은 태중 소경이며,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부류는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9,40)라고 항변하자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직설적으로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라고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9,40~41)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미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육적으로 볼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릇되게, 왜곡되게 봄으로써 늘 빛이 아닌 어둠 가운데 있기에 여기 우리 가운데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당신과 당신이 하신 일을 알아볼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눈 뜬 이를 보게 하는 것과 모든 치유는 단지 치유만이 아니라 치유를 통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질병-악-죄로 고통받고 있는 당신 자녀들에 대한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여기 함께 계심을 그리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심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생의 신비를 통하여, 어둠 속에서 살던 인류에게 신앙의 빛을 주시고, 옛 죄의 종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재생의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나이다. 아멘』 (감사송)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