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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_김건태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1일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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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_사순 제2주일
복음: 마태 17,1-9: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1. 영광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전해준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은 눈부시게 희어졌으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이 사건은 단순히 기적적인 광경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한 길 위에서 미리 드러난 부활의 영광이다. 예수님은 곧 다가올 수난의 길이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영광으로 가는 길임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교리서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예수님의 변모는 그분의 인성 안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낸다. 이는 그분의 수난 이후에 완전히 드러날 영광의 예고이다.”(554항)
2.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신앙의 순종 하늘의 음성은 우리에게도 반복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이 말씀은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분의 길을 따르라는 초대다. ‘듣는다’는 히브리어 שָׁמַע(쉐마)는 “듣고 실천하다.”라는 뜻을 함께 지닌다. 즉, 신앙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삶을 통한 응답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 “그리스도는 산 위에서 변모하셨고, 그분의 제자들은 그 빛 속에서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그 빛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를 져야 한다.”(Sermo 78,6) 즉, 제자들이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영광의 신비와 수난의 신비를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시려 했다.”(Homilia in Matthaeum 56, 2)
3. 믿음으로 떠나는 여정: 아브라함의 순종 제1독서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창세 12,1) 미지의 땅으로 나아갔다. 그의 믿음은 확실한 보장을 보고서가 아니라, 말씀만을 믿고 떠나는 신뢰의 순종이었다. 교리서는 말한다.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그 말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신비를 드러내지만, 믿음은 그 신비 안으로 자신을 맡긴다.”(142항) 사순 시기,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순종의 신앙으로 떠나야 한다. 신앙은 단지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며 걷는 길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3)
4. 변모의 빛: 우리 안에서의 내적 변화 예수님의 변모는 우리의 변모를 향한 표징이기도 하다. 성 이레네오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서서히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닮아간다. 교리서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는 성령의 은총으로 가능하며,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는 묵상을 통해 이루어진다.”(556항)
5. 실천적 결론: “듣고, 변모하라.” 오늘 복음의 핵심은 분명하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절) 이 말씀은 사순 시기를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의 길잡이다. 예수님의 변모는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신비이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할 때,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 안에서 다시 빛나며, 그분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희망을 얻게 된다
김건태 신부님_주님은 우리의 희망 [말씀] ■ 제1독서(창세 12,1-4ㄱ)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함께 인류 범죄의 역사는(창세 3-11장) 구원의 역사로 방향을 틀며, 이 이야기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앙의 기초와 모범을 확인합니다. 아브라함은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포기함과 아울러 앞으로의 떠돌이 생활에서 감수해야 할 각가지 위험을 수용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 밟아나갈 크나큰 모험을 앞서 걸어 나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흔쾌히 받아들인 하느님의 뜻은, 세상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 곧 이스라엘을 통하여 축복을 받게 하는 데 있습니다. ■ 제2독서(2티모 1,8ㄴ-10) 삶의 마지막 순간 사도 바오로는 자기의 뒤를 이어 사도직을 수행할 제자 티모테오에게 편지를 씁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가 자기와 똑같이 겪을 고통의 시간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용기를 북돋워 주는 희망적인 조언을 잊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시는 가운데 큰 은총을 베푸실 것이며, 이 은총은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삶의 충만함을 보여주신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그 안에 주님의 뜻이 있음을 굳게 믿고 꾸준히 달려 나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 복음(마태 17,1-9)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 제자들은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들을 비로소 알아듣기 시작합니다. 타볼 산에서 주님께서 빛나는 모습을 보이셨을 때 당시는 무슨 의미였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것이 그분의 본래 모습이었음을 비로소 인식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향하고자 했던 분, 엘리야를 포함한 모든 예언자가 백성들에게 예고했던 분이 바로 주님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제자들처럼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 모시기 위해서는 우선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은 그 다음의 순리입니다. [새김]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누구나 온갖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시련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고 극복하고자 노력해 나갈 때 비로소 기쁨과 보람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음을 채우고 있는 너저분한 욕심을 포기해야 하고 삶의 안정을 지탱해 주는 세속적인 요소들을 털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긴 여정이기에 늘 새롭게 출발하겠다는 마음, 매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죽어 다시 태어나겠다는 자세가 절실합니다.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이 보여주었던 모습이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본받아 간직해야 했던 모습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걸음은 때로는 너무나 힘들어 캄캄한 암흑 속을 걷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이 어둠을 비춰줄 수 있는 밝은 빛이 주어집니다. 이 빛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 생활을 하던 이집트를 떠나 황량한 광야를 통과할 때 그들을 인도했던 ‘구름’에서 그 예표를 찾으며, 오늘 복음 속에 등장하는 구름 역시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예표이며 우리를 본고향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힘든 시간, 고통스러운 여정이라 하더라도, 주님이 가신 길 따라 그분과 함께 열심히 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시기, 되찾으려는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도 중에 우리는 우선 주님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고, 내 본래의 모습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나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힘과 용기를 내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앞서가십니다. 뒤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하늘 소리에 응답하는 길입니다. 모두 함께 열심히 뒤따라가는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병우 신부님_제목 <사순 제2주일>(3.1 <사순 제2주일>(3.1)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인 십자가!' 오늘 복음(마태17,1-9)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타볼산)으로 오르십니다. 그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거룩하게 변하셨는데,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예수님의 옷은 빛처럼 해얘졌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고 암시해 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부활의 상징인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예고'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에 이어집니다. 이는 부활의 대전제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와 영원히 살고 싶으면 예수님처럼 죽어야 하고, 너를 위해 나 자신을 온전하게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신앙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지 못하는 근본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너의 문제에 있지 않고,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나의 의지(뜻) 때문이지 않을까? 오늘 제1독서(창세12,1-4ㄱ)는 "떠나라."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람의 믿음'을 전합니다. 75살의 늦은 나이에 하란이라는 삶의 터전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는 아름다운 믿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2티모1,8ㄴ-10)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1,8ㄴ) 복음(기쁜소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은 '삼일절', 우리나라의 해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이들의 숭고한 죽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부활(해방)을 위해 예수님처럼 기꺼이 내어놓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송영진 신부님_<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마태 17,1-9).”
1)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히브 1,1-4).” 사도들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목격한 일은, 승천 후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체험한 일이고, 예수님이 지니신 ‘하느님 영광의 광채’를 ‘미리’ 체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 전에 미리 그것을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사도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의 ‘희망’이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둔 확실한 희망이라는 것을 보증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고, 예수님의 재림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인데, 제자들의 체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 일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희망과 믿음을 우리에게 주는 증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그 희망이 있으니까 믿는 것이고, 사랑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희망이 없으면 믿어야 할 이유가 없고, 동시에 사랑도 힘을 잃게 됩니다.
2)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모든 신앙인의 희망을 나타낸 말입니다. 이 말은, 최후의 만찬 후에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에 연결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제자들이 체험한 일은, 예수님의 이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미리 체험한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다.’입니다. ‘영광을 보다.’는, ‘영광에 참여하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최고로 행복한’, 또는 ‘정말로 황홀한’ 생활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3)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말을 중단시키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베드로 사도의 소망 자체는 훌륭한 것이지만, 우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의 말을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하느님의 공식 선언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예수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신앙인들이 우선 먼저 해야 할 일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고, 영광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행복을 얻어 누리기를 바란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쪽의 인생과 저쪽의 인생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인생을 생략하고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이쪽에서 아무렇게나 막 살던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도 없습니다.> 9절의 ‘침묵 명령’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할 자격을 갖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출처] 사순 제2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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