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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2월26일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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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오늘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향하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을 건네십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가 향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혀주십니다. 하느님은 그 어떤 아버지보다 자비로운 분이시며 우리의 바람에 꼭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보장해 주십니다. 꾸준히, 정성을 다해,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기도하면, 꼭 들어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대로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체험한 적이, 원망하거나 체념한 적이, 그래서 때로는 신앙의 위기 앞에 선 적도 있습입니다. 청했지만 받지 못했고, 찾았지만 얻지 못했고, 두드렸지만 열리지 않았던 적 말입니다. 진지하게, 그리고 큰 믿음으로 오랫동안 주님께 기도했지만, 육체적이면 정신적인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지만, 별 효과가 없어 보였던 경우 말입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건가요? 기도하는 나인가요, 아니면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인가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읽고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할 때마다, 아버지는 귀를 기울이시고 들어주시고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우리의 바람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십니다.
다음, 예수님은 하느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바를 그대로 주시면서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며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를 잘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단 것을 좋아하는 자녀에게 청할 때마다 매번 단 것을 주지 못하고,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인들의 기도 자세는, 예수님이 성부께 올리셨던 기도대로,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헛됐거나 가납되지 않았다 하는 심적인 고통 정도는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기도는 항구하게 해야 한다.’는 불변의 가르침 속에는, 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한다는 의미 이상으로, 기도하는 나의 자세와 내용에 대한 꾸준한 반성도 겸비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빛을 청해야 하는데 어둠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의를 찾아야 하는데 불의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실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데 거짓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입니다. 더욱이 이웃의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기도한다면,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는 주님의 가르침 앞에 무슨 낯으로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하루, 기도의 자세와 내용을 바로잡고, 특히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의 뜻대로 내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남에게 해 주는 신앙인다운 하루 꾸며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간단한 동사를 우리에게 제시하신다.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 이것은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신앙인의 삶 전체를 지탱하는 기도의 영성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버지께 무엇을 청하든지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주시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세속적 욕망이 아니라, 참으로 유익한 것, 즉 성령과 구원이다(루카 11,13 참조).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할 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주신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Sermo 56,6)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사랑의 계명을 살아낼 힘”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7절) 찾는다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향한 집요한 열망이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가르친다. “찾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지적이고 영적인 탐구이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그분을 찾고, 기도 안에서 그분을 만나며, 사랑의 실천안에서 그분을 소유하게 된다.”(In Matthaeum 18,5) 따라서 우리가 신앙의 길에서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고,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그 진리를 확인하며, 삶 속에서 그 진리를 살아내는 것이 바로 ‘찾음’의 여정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문을 두드려라.”(7절) 하신다. 이는 단순한 한두 번의 시도가 아니라, 인내와 항구함을 요구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청하는 것을 당장 주지 않으심으로써 우리의 기도를 시험하시고, 우리가 끝까지 항구하게 청하는지를 보고자 하신다. 항구한 기도는 영혼을 더욱 정화하고, 마음을 준비시켜 주님이 주시는 선물을 담을 수 있게 한다.”(Hom. in Matthaeum 23,3) 기도는 하느님과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는 문을 두드리는 행위다.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곧바로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하신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12절) 이것이 바로 기도와 사랑의 일치다. 교부들은 기도를 통해 받은 은총이 반드시 사랑의 행위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도와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두 날개와 같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동시에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 속에서 우리가 받는 은총은, 형제에게 나누어 주도록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기 때문이다.”(De Officiis I, 88) 이것이 황금률이다. 참된 기도는 결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반드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면, 그분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곧 성령과 사랑의 은총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사순 제1주간 목요일>(2.26)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7,7)
'올바르게 청하자!'
오늘 복음(마태7,7-12)은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는 말씀과 '황금률(7,12)'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9-1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듯,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원을 꼭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청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과 불순종의 삶,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부활)과 죽음의 삶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 사랑이신 하느님, 질투하시는 하느님을 떠나서는 죽음이고, 하느님 안에 머물면 산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청원이 올바른 청원인지, 합당하게 청하고 있는지'입니다. 임기응변 식으로 지금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눈 앞에 닥친 당장의 이익만을 위해서 청하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상시에는 제대로 믿지 않다가, 필요할 때만 믿는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상시에 제대로 믿는 믿음과 기도는 '하느님의 영적 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영적 보험.
우리는 단지 믿고, 청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단지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그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제대로 믿고 올바르게 합당하게 청합시다!
송영진 신부님_<우리는 ‘기도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7-12).”
1)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어떤 극한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데, 그러나 많은 경우에
‘더 큰 낙담’에 빠지게 만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해도 절망적인 상황이 조금도
바뀌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이 실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은 시편이 있습니다.
“주님, 언제까지 마냥 저를 잊고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시렵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제 영혼에, 번민을 제 마음에 날마다 품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원수가 제 위에서 우쭐거려야 합니까?
살펴보소서, 저에게 대답하소서, 주 저의 하느님.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 제 눈을 비추소서. 제 원수가
‘나 그자를 이겼다.’ 하지 못하게, 제가 흔들려 저의 적들이
날뛰지 못하게 하소서.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의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제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주님께 노래하오리다(시편 13,2-6).”
여기서 네 번이나 나오는 ‘언제까지’ 라는 말이
특별히 눈에 뜨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이라는 말도 눈에 뜨입니다.
이 말은, “다 포기하고 자살하는 일이 없도록”으로
해석되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고 묻는데,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에는 그 ‘언제’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믿고 기다려라.” 라는
말씀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ㄴ).”
“언제까지?” - 예수님의 대답은 “지체 없이”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또다시 “나는 그 약속을 전혀
실감할 수 없다. 예수님의 ‘지체 없이’ 라는 말씀은,
내가 생각하는 ‘지체 없이’와 다른 것 같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릅니다.
주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체 없이’는,
“주님께서 정하신 가장 좋은 때에 지체 없이”입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드는데,
“믿음은, 인내와 기다림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신앙인이든지 신앙 없이 사는 사람이든지 간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형편은 별로 다르지 않은데,
그래도 신앙인은 비신자들에게는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은총이고 힘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누구든지 ‘기도하는 중에’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평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 평화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힘입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3)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 5,14-15).”
여기서 중요한 말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입니다.
<‘주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또는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청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아무거나 다’ 청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나에게만’ 좋은 것을 청하면 안 되고,
‘모두에게’ 좋은 것을 청해야 합니다.
12절의 ‘황금률’이 바로 그런 가르침입니다.
나에게만 좋은 것을 청하는 ‘이기적인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2ㄹ-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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