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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2월 20일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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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참된 단식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첫날인 재의 수요일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길 또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 그 의미를 모르지는 않으나, 임하는 자세가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함을 아울러 배웠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말씀의 주제는 단식, 어떻게 보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단식 문제입니다.
구약시대 유다인들은 ‘속죄의 날’(욤 키푸르)에 단식했으며, 특히 예루살렘 포위와 파괴, 푸림절 등 과거의 국가적 재난을 기념하는 날에도 공동으로 단식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 2회 단식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마르 2,18; 루카 18,12 참조). 이들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규정한 의로움을 일부만이라도 단식으로 성취하려 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성격의 단식을 명하시지 않는 것은 의로움 규정을 경시한다거나 폐지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의로움을 실천했다고 나팔 부는 것을 금하시며, 더 높은 경지의 의로움 실천을 요구하십니다. 곧 재물로부터의 해방과 자발적 금욕,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한 자아포기를 역설하십니다.
보여주기 위한 단식 실천에는, 예언자들이 그토록 질타한 형식적이며 위선적인 모습, 곧 오만과 자기과시의 위험이 깔려 있습니다. 하느님께 기쁨이 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참된 단식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소리 높이고 있는 대로, 고통 속에 있는 이웃들을 위한 사랑 실천과 연계되어야 하고, 자선과 기도에서 분리될 수 없는 행위,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단행하는 행위이어야 함에도 말입니다. 엊그제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예수님은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식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알고 계셔야 그분께 대한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순수한 표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신랑을 빼앗길 날’, 그래서 ‘신랑을 뵐 수 없는 날’은 우선 주님의 십자가상 죽음과 묻힘 상황을 고려해 볼 수 있으나, 나아가 박해시대를 포함해서 ‘주님을 자유로이 뵙기에 어려운 모든 날’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때의 단식은 슬픔과 좌절의 행위라기보다는, 주님을 다시 뵙고자 하는 ‘열망의 몸짓’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주님 뵙기를 어렵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가 오로지 외부 환경에 의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더 많은 경우가 ‘내 마음’이라는 내부적 요소에 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외부적 요소가 주님 뵙기를 방해한다면, 신앙의 힘으로 싸워 이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단식을, 그것이 내부적 요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끊고 고치고 비워버리겠다는 신념의 표현으로 단식을, 그럼으로써 다시 주님을 뵈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겠다는 열망의 표현으로 단식을 다짐하며, 오늘 하루 거룩하고 은혜로운 하루 맞이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5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의미를 새롭게 밝혀 주신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줄이는 행위가 아니라,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하는 표지이다. 재의 예식을 시작으로 사순시기를 걷고 있는 우리는, 신랑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서 떠나신 그 고통의 시간을 기억하며, 단식과 절제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정화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단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단식은 단지 음식을 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단식의 참된 열매는 자비와 사랑이며, 이것이 없다면 단식은 헛되다.”(De Jejunio) 즉, 우리의 단식은 단순히 외적 행위가 아니라 내적 회개와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단식은 끝이 아니라, 더 큰 충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성체를 “불멸의 약, 곧 죽지 않도록 하는 약이며, 영원히 살게 하는 약”(Epistula ad Ephesios 20,2)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단식하는 이유는, 세상의 음식보다 더 위대한 양식인 성체를 향한 갈망을 키우기 위함이다.
또한 성 아우구스티노는 성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들이다.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실 때,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받아 모신다. 곧 교회의 신비를 받아 모신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26,13) 따라서 성체성사는 단식의 결핍을 채우는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은총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또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가 성경 안에서 그분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때만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Sermo 232, 2) 곧, 우리는 단식과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더 깊이 듣고, 그 안에서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말씀을 받아 모시고, 성체성사 안에서 그분을 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 위에 서게 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단식은 단순한 음식 절제가 아니라,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성체는 우리가 단식을 통해 더욱 간절히 바라보게 되는 참된 양식, 곧 우리를 교회로 세우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불멸의 약”이다. 말씀과 성체 안에서 그분을 알아볼 때,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게 된다.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단식과 기도를 통해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갈망을 새롭게 하고, 성체와 말씀 안에서 참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맛보도록 초대받는다. 신랑이신 주님을 기다리며, 단식과 절제 속에서 마음을 정화하고, 성체성사로 새 힘을 얻어 교회의 몸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마태9,15ㄱ)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
오늘 복음(마태9,14-15)은 '단식 논쟁'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9,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단식의 본질?'
단식의 일반적인 의미는 우리가 먹어야 할 그 무엇을 먹지 않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건강 때문에 단식하기도 하고, 어떤 중대한 결심과 각오를 드러낼 때의 표시로 단식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하는 '신앙적 단식'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단식이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위한 단식입니다. 이를 위해 장애되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단식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오늘 독서(이사58,1-9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에 대한 말씀인데,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다."(이사58,6-7)
이것이 바로 '단식의 본질인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입니다. 이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하게 머물러 있을 때에 가능한 단식입니다. 때문에 '단식은 구원에 이르 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을 합시다!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은 우리를 먹이려고, 또 살리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1) 성경에서 ‘메시아 시대’를 ‘잔치’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이사 55,1-2).”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자기 집을 지었다. 짐승을 잡고
술에 향료를 섞고 상을 차렸다. 이제 시녀들을 보내어 성읍
언덕 위에서 외치게 한다.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지각없는 이에게 지혜가 말한다. ‘너희는 와서
내 빵을 먹고, 내가 섞은 술을 마셔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살아라. 예지의 길을 걸어라.’(잠언 9,1-6)”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
<‘메시아 시대’를 잔치로 표현한 것은,
‘기쁨, 행복, 풍요로움’ 등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하늘나라 잔치에 참석하라는
‘초대’와 같고, 신앙생활은 그 초대에 대한 ‘응답’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2)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신심을 드러내기 위한’ 단식이었습니다.
14절의 ‘많이 하는데’ 라는 말은, 그들이 “단식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슬퍼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단식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안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하면 안 되는 단식’이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하면
안 되고, 메시아와 함께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기뻐해야 할 때”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손님들’이라는 표현은, 신앙인들이 손님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직접 잔치를 준비하시고
베푸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잔치의 ‘주인공’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식을 시키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먹이려고 오신 분인데, 그런데 아무나
‘하늘나라 잔치’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격’을 갖춘 사람만 먹을 수 있습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1-14).”
‘혼인 예복’은 잔치 음식을 먹을 자격을 뜻합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을 뜻합니다.
그 자격을 갖추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4) 15절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단식’은 ‘회개의 단식’을 뜻합니다.
‘회개의 단식’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예는,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 사람들’의 단식입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 옷을 입었다(요나 3,4-5).”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의 단식’은
글자 그대로 ‘살고 싶어서 실행한 단식’입니다.
혹시라도, “하느님을 안 믿고 살던 사람들이 멸망 선포
때문에 겁이 나서 한 일이니, 진정성 있는 단식이라고
말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회개를 인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실행하는 ‘회개의 단식’도 ‘살고 싶어서’,
즉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단식이란, 원래는 죽기를 각오하고 하는 일,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그냥 이대로
죽는 것이 낫다.” 라는 심정으로 하는 일입니다.
사실 신앙생활 자체가 목숨을 걸고서 하는 생활입니다.
구원과 멸망 가운데에서 구원을 선택하고, 생명과 죽음
가운데에서 생명을 선택하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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