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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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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타 여행 중에 많은 분을 만났습니다. 저와 일행을 위해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미사를 준비해 준 가족이 있습니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집니다. 안나 자매님이 있습니다. 아직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센터와 신부님을 도와주시기에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와 같다고 해서 미리 세례명을 정해 드렸습니다. 저와 일행을 위해서 기꺼이 저녁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아우스팅 형제님이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갔을 때 세례명을 미리 정해 드렸는데 지난 성탄 무렵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대사관에서 일하면서 교민들의 민원을 잘 해결해 주고 있었습니다. 요한 형제님이 있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6월에는 세례를 받을 거라고 합니다. 형제님은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새로 시작하는 식당을 축성 받았습니다. 신자인 어머니의 말을 듣고 성당에 올 때는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온다고 합니다. 이번도 6월에는 세례를 받을 거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바오로 사도처럼 센터에서 복음을 전하는 신부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과 몬시뇰도 만났습니다. 신부님은 콜롬비아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저와 같은 성씨였습니다. 족보를 따지니 저에게는 조카와 같았습니다. 이름이 저의 조카와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물으니, 저와 같은 돌림 자였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조카와 같은 신부님을 만나니 반가웠습니다. 사람은 늘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저를 위해서 좋은 술을 가져왔고, 저도 신부님을 위해서 용돈을 드렸습니다. 교황 대사관에서 사목하는 몬시뇰도 만났습니다. 몬시뇰은 르완다에도 있었고, 벨기에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작년에 콜롬비아로 왔다고 합니다. 이야기하다 보니 제가 아는 신부님과 로마에서 같이 공부했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신부님과 몬시뇰과 대화하면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외국에 살아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저만 해도 외국에 살면서 ‘주눅’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신부님은 ‘K Culture’의 세대였습니다. 몬시뇰도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이 멋져 보였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눔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예수님께서도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려고 한다면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고 한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신앙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반했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죄를 묻지 않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던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키고, 계명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크시기 때문에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혼인을 앞둔 젊은이에게 해 주는 덕담이 있습니다. 서로의 조건을 보기보다는 서로에게 감추어져 있는 가능성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온달은 평강공주를 신뢰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보다는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면 더 큰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좌 신부가 그럴 수가 있나.’라고 험담하기보다는 ‘보좌 신부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면 더 큰 신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죄인을 받아 주셨고, 아픈 이를 위로해 주셨고, 배고픈 이를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넘어진 이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강도당한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돌아온 탕아를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입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 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며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며 받아 주고, 품어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콜롬비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신부님과 공동체에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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