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1일 (토)
(자)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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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기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 2월19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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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2-19 ㅣ No.188073

김건태 신부님_십자가와 신앙인

오늘 복음은 간결하지만 중요한 수난과 죽음과 부활 예고 말씀으로 열립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와 루카 복음서를 가리키는 공관복음서에서,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이 각각 세 차례씩, 다해서 아홉 차례 언급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 예고 말씀의 중요성을 잘 대변해 줍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실 때는,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고 난 다음이며, 이어서 함구령, 그리고 이 예고 말씀이 자리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이 진정한 의미를 갖추기 위해서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부활의 큰 기쁨을 준비하는 이 사순시기 동안,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뒤를 따라 걸어가며,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 고백에 이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따라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보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며, 따르는 구체적 증거로 “자신을 버릴 것”과 “제 십자가를 질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속적인 욕심을 내려놓음을 뜻하며, 제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각오도 마다하지 않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 첫 번째 가르침은 예수님 시대도 시대지만, 이어진 제자들의 시대, 곧 박해 시대에 더욱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들은 물론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님과 복음에 충실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 바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입니다. 전혀 새로운 가르침, 역설적인 가르침입니다.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이 참 생명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제자들과 군중들은 도대체 이분이 어떠한 분이시기에 육체적인 생명 포기까지 말씀하시는 것일까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르신 주님을 뵙고 난 다음, 역설적인 이 가르침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고, 비로소 주님을 따라나설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맞는 말씀입니다. 소모되어 사라져가는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참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오직 ‘주님과 그분 말씀 선포와 실천’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부끄러워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사순시기 두 번째 날, 나에게 주어질 상황, 그것이 고통이라면 더욱더,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고 기꺼이 짊어지고 묵묵히 주님 뒤를 따라 걸어가는 자신감 넘치는 하루, 나아가 이웃의 십자가가 정말 무거워 보인다면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는, 너그럽고 여유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9,22-25: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면서, 그분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분명히 알려주신다. 곧, 제자됨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며, 자기 부인의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여기서 십자가는 단순히 외적인 고통이나 시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 싸움, 즉 이기심, 교만, 탐욕, 안일을 내려놓는 것을 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네 자신을 이기는 것이 가장 큰 승리다. 너 자신이야말로 가장 무거운 십자가이다.”(Sermo 96,1) 결국 내가 져야 할 십자가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이기심과 자아의 욕망을 다스리는 길이다. 

 

교회도 이 점을 분명히 가르친다. 교리서(2015항)는 말한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좁고 험하다. 자기 부인과 고통을 거쳐야만 그리스도의 생명과 일치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자됨은 단순한 도덕적 노력이나 이상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일치이다. 

 

사순시기는 바로 이 자기 부인의 길을 새롭게 배우는 은총의 때다.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으며 우리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이 말씀은 허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 속한 존재임을, 생명이 내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봉헌이어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권고한다. “네가 가진 것을 네 이웃과 나누라. 그것이 바로 너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Hom. in Matth. 55,2) 곧, 우리가 재물이나 시간, 재능을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쓴다면 결국 생명을 잃지만, 그것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나눌 때 생명은 오히려 영원히 보존된다는 것다(루카 9,24 참조). 

 

사목적으로 본다면,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구체적 도전이 된다. 가족 안에서 내 고집을 내려놓고 화해와 용서를 선택하는 것, 공동체 안에서 내 자리를 주장하기보다 봉사의 자리를 선택하는 것, 사회 안에서 나의 안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약자를 위해 시간과 정성을 쓰는 것, 이러한 작은 선택들이 바로 우리가 날마다 지는 십자가이며, 그 길이 부활로 가는 길이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십자가도 결국 생명과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다. 사순시기를 통하여 우리가 모두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주님과 더욱 깊이 일치하여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기를 기도하자. 아멘. 

 

이병우 신부님_"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예수님을 따라가자!' 

 

오늘 복음(루카9,22-25)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는 말씀과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9,22) 

 

이어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루카9,23-25) 

 

사순시기는 '보다 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비우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완전히 비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더 머무는 시기'입니다. 결정적으로 '참으로 쉽지 않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는 오늘 독서(신명30,15-20)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생명과 행복을 선택하는 시기, 생명과 축복 속에 머무는 시기'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30,15.19-20ㄱ)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께서 걸어가신 그길을 우리도 함께 걸어갑시다! 

 

송영진 신부님_<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2-25)”

 

 

 

1) 여기서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고, ‘제 십자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잘 참고 견뎌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서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냥 이집트인들을

 

섬기자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탈출 14,11-12).

 

그들은, 바다에 빠져죽거나 이집트 군대의 칼에 맞아죽을

 

수밖에 없으니 육신의 목숨이나 지키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탈출 14,15).

 

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그리운 고향이 ‘앞에’ 있기

 

때문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뒤로 돌아서서 항복하고 노예가 되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일의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죽음의 바다’를 지나 ‘생명의 고향’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앞으로, 또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힘들다고, 재미없다고 돌아서면 멸망을 맞이할 것입니다.

 

만일에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을

 

안 해도 되고, 십자가를 지기 싫으면 거부해도 됩니다.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은 의무가 아니라 각 개인의

 

자유 선택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십자가도

 

의무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십자가를 피하면, 힘든 일은 피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버리고 영원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살고 싶으면 이 약을 먹어라.”

 

하면서 특효약을 주었을 때, 그 병자가

 

약이 너무 쓰다고 하면서 먹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사는 것을 포기하고 죽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십자가의 길’ 끝에 부활과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에 부활과 생명이 없다면,

 

십자가는 아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열매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열매가 없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현세적인 소원이나 빌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3) 이 모든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신앙생활이

 

힘든 것은 힘든 것이고,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야고 5,7-8).”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6ㄴ-7).”

 

 

 

4) 사람마다 다른 탈렌트가 주어지는 것처럼,

 

십자가도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만

 

나에게 주신다.”가 우리의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와 나의 십자가를 비교할 필요가 없고,

 

‘내 십자가’가 더 크고 무겁다고 불평해도 안 됩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지고 갈 수 없는 십자가라면,

 

예수님께서 함께 지고 가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만 시키시는 분입니다.

 

<실제로는 이웃들이 나누어서 함께 질 것입니다.

 

‘사랑’은 십자가의 무거움을 덜어 주는 ‘큰 힘’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만 바라보다가 부활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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