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5일 (일)
(녹) 연중 제6주일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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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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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08:22 ㅣ No.188009

[연중 제6주일 가해] 마태 5,17-3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 자기의 일은 알아서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어린 시절 TV에서 자주 보았던 한 교육회사의 CM송입니다. 학생들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공부는 부모가 시켜서, 혹은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본인의 자아실현과 참된 행복을 위해 해야 할 ‘자기의 일’로 여기며 능동적, 적극적으로 해야 더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공부를 ‘자기 일’로 여기는 학생은 선생님이나 부모가 정해준 분량을 채웠다고 해서 바로 책을 덮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 모르는 게 무엇이고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찾으며,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공부합니다. 또한 누가 시켜서 억지로,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서 마지못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때가 되면 알아서 공부합니다. 그렇게 ‘최소의 공부’가 아닌 ‘최선의 공부’를 함으로써 매일 조금씩 성장하여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은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과 계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내 삶에서 완성되어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으려면 ‘스스로’, ‘알아서’ 지켜야 하는 겁니다. 이에 대해 집회서의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또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하느님은 인간을 어떤 명령어를 입력하면 정해진 결과를 출력하는 ‘기계’로 창조하신 게 아니라, 스스로 하느님 뜻에 맞는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나쁜’ 것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죄악의 어둠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간다면 그건 전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스스로의 책임이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과 일치되어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시니, 그런데 그 행복은 그분 뜻과 계명을 억지로 따른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게 아니니, 마음에서 우러나온 의지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눈치를 보며, 그들에게 의롭게 보이려고 마지못해 율법규정을 지켰기에 그것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수준, 즉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로는 율법을 어기지 않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수도, 그분과 일치하여 참된 행복을 누릴 수도 없지요. 하느님 말씀을 기꺼이, 기쁘게 따라야 그 안에 숨어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보이고,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사랑으로 온전히 일치되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위’를 조심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더 자세히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뜻을 거스르게 만드는 나쁜 마음을 비워내는데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를 총 세가지 항목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십니다. 첫째,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를 세심하게 헤아리며 삼가라고 하십니다. 또한 누군가가 나에게 서운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면 당장 그로 인해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상황을 방치해두지 말고 그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그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의 근본정신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을 막는 데에 있지 않고, 용서와 화해로 갈등을 극복하여 참된 형제애를 이루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겠지요.

 

둘째, ‘간음’이라는 죄를 저지르지 않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말고, 이성을 바라보는 마음가짐 자체를 바꾸라고 하십니다. 간음이란 혼인의 유대로 맺어지지 않은 사람과 부정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그런 죄를 저지르는 것은 우리 마음이 성적 욕망에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성을 내 욕망을 해소할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삶의 동반자’로 만들어 주신 이성을 사랑과 존중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들기에,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완성을 향해 함께 나아가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지요. ‘성격 차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갈라서려는 모습이, 이혼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두 사람이 맺은 유대가 끊어진다고 여기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하는 행위가 간음인지 아닌지를 따지며 책임을 회피할 궁리를 하기보다, 나를 죄짓게 만든다면 내 신체의 일부라도 잘라버리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자기 마음 속에 자리잡은 욕망들을 철저히 비워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그 욕망이 만드는 죄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거짓 맹세’를 하지 않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말고, 나와 내 삶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 자체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 앞에서 자신을 뽐내며 드높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지킬 능력도 상황도 안되면서 헛된 약속을 ‘공수표’처럼 남발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그 공수표가 ‘부도’가 나면 나는 내 입으로 내뱉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예 맹세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실 수 있는 분은 세상에 오직 하느님 밖에 없으니, 그분의 뜻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이라면 “예”하며 철저히 순명하라고 하십니다. 반면 내가 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되는 일이라면 “아니요”하며 단호히 배격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단순하고 분명한 식별과 실천만이 우리를 하느님의 뜻에서, 그리고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신앙생활에 세 가지 길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금하신 것을 피하는 것’,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을 따르는 것’,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 이 세 가지 길 중에 어느 것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인지 그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요. 그러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소극적 계명보다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적극적 계명을 따라야겠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소극적 계명보다 “이성을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적극적 계명을 따라야겠습니다.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소극적 계명보다 “하느님 뜻에 철저히 순명하라”는 적극적 계명을 따라야겠습니다. 그 실천을 통해 한 발 한 발 확실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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