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5일 (일)
(녹) 연중 제6주일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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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_연중 제6주일 ? 성체 성사가 아니면 새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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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06:39 ㅣ No.188003

어느 가난한 청년이 자신이 세계적인 재벌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해 할인하는 삼각김밥만 찾아다니며, '오늘도 끼니를 굶지 않았으니 참 행복하다'고 자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비서가 찾아와 상속 문서와 함께 엄청난 액수의 통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첫마디로 이렇게 물었답니다. “우와! 그럼 저 이제 삼각김밥 두 개 한꺼번에 먹어도 되나요?”

어쩌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 이 청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어마어마한 상속권을 가졌으면서도, 고작 죄 안 짓고 지옥 안 가는 수준의 삼각김밥 같은 행복에 만족하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들을 보면 숨이 턱 막힙니다. 살인을 안 하는 건 당연하고 화도 내지 마라, 간음을 안 하는 건 기본이고 음탕한 마음조차 품지 마라. 이건 인간더러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말씀 같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이 높은 벽을 넘을 수 있을까요?

문제의 핵심은 내가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에 있습니다. 내가 행복을 바라는 만큼 계명을 지킬 수 있고, 나의 행복은 내 정체성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은 곧 내가 바라는 행복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노예는 주인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저 주인에게 혼나지 않을 정도로만, 딱 매를 피할 정도로만 계명을 지킵니다. 그래서 노예에게 법은 무거운 사슬입니다. 겉모양만 조심하면 그만이지요. 하지만 자녀는 다릅니다. 자녀는 부모처럼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부모가 누리는 그 깊은 평화와 사랑을 나도 똑같이 누리고 싶어 하기에, 부모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마음의 깊이까지 본받으려 애쓰게 됩니다.

불가의 경허 스님 일화가 이 차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시냇가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자, 젊은 수도승은 계명에 얽매여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노승 경허는 선뜻 처녀를 등에 업어 건너주었습니다. 십 리 길을 더 간 뒤에야 제자가 따져 물었습니다. “수도자가 어떻게 여자를 업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경허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놈아, 나는 벌써 그 처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네놈은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

젊은 제자는 계명에 충실했을지 모르나,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신적인 기쁨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노예는 법을 지키는 데 급급하지만, 자녀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데 집중합니다. 하느님은 계명이라는 사슬에 묶여 쩔쩔매는 이들을 따분해하십니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개구리의 기도 1』에 나오는 80세 노인의 풍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계명을 완벽히 지켰지만 정작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정말이지 따분한 사람이다”라는 대답을 들었던 이유는, 그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행복을 즐긴 것이 아니라 노예처럼 보상만 바랐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서』 15장에 나오는 큰아들 역시 아버지 곁에서 한 번도 명을 어긴 적이 없었지만, 스스로를 종(Schiavo)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본성을 공유한 아들이 아니라 보상을 바라는 노예였기에, 동생이 돌아와 잔치가 벌어졌을 때 함께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계명은 지켰으되 행복의 맛은 전혀 몰랐던 불행한 모범생이었습니다.

우리는 더 차원 높은 행복을 욕망해야 합니다. 레스토랑의 일용직 조리사는 주방장이 시킨 레시피의 양만 정확히 지키면 임무가 끝납니다. 하지만 주방장의 아들은 아버지가 요리를 완성하고 손님이 맛있게 먹을 때 느끼는 그 희열을 닮고 싶어 합니다. 노예는 사고가 안 나면 행복하지만, 자녀는 아버지가 만든 최고의 맛을 낼 때 비로소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 소개된 한 감동적인 실화는 이 자녀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한 새아버지는 아내와 결혼할 때, 자신이 가장 아끼던 꿈의 자동차를 팔아 결혼 비용을 마련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딸은 수소문 끝에 아버지가 팔았던 바로 그 차를 찾아내 정성껏 고쳐서 아버지에게 선물했습니다. 딸의 마음은 의무감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들을 위해 소중한 것을 포기했을 때 느꼈을 그 아픔과 행복을 자신도 똑같이 느끼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기꺼이 작아지셨으니, 나도 아버지처럼 사랑하며 행복해지겠다는 자녀의 갈망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처럼 행동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살인을 넘어 분노까지, 간음을 넘어 음탕한 눈길까지 다스리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법은 노예들이 죄에 빠지지 않게 막아주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었지만, 신약의 법은 하느님인 우리가 하느님답게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본성의 법입니다. 아버지가 화를 내지 않으시기에 영원히 행복하시니, 하느님인 너희도 그 평화를 누리려면 마음속 분노라는 독초를 뽑아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어 주석서 『La Sacra Bibbia』는 이 대목을 노예의 의무에서 아들의 모방으로의 전환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느님처럼 화를 안 내고 하느님처럼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의 의지로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로 성체성사의 신비가 등장합니다.

밀떡이 신부님의 축성 기도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듯, 성체를 모신 우리도 하느님의 본성으로 변화됩니다. 교부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사랑하고 하느님처럼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는,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에너지가 우리 혈관 속에 흐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오늘 복음의 그 높은 계명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힘으로는 가능해집니다.

 

결론적으로, 계명을 잘 지키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우리가 성체성사로 하느님의 본성을 받은 하느님임을 깊이 믿읍시다.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군에게 붙잡힌 어린 왕자 루이 17세(도팽)가 천박한 욕설을 강요당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던 이유를 기억하십시오. “나는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 천한 말은 결코 내 입에 담을 수 없다.”

이것이 하느님의 본성을 가진 이의 품격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인 내 정체성에 맞지 않기에 죄를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먼저 내가 성체로 인해 하느님임을 믿읍시다. 내가 누구인지 믿는 만큼 내가 추구할 행복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처럼 행복해지기를 욕망할 때, 계명은 우리를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의 정원으로 날아오르게 하는 눈부신 날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 힘겹게 보이던 계명이 다 지켜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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