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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 수원 교구청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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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활기찬 공동체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십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이름도 다양하며(구약시대에는 킨네렛, 겐네사렛, 신약시대에는 갈릴래아, 티베리아 호수로 불림), 크기도 만만치 않아(길이: 23km, 폭: 11km, 둘레: 53km, 깊이: 50m) 배를 이용하여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겐네사렛은 이 호수 북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병든 이들을 데려와, 그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늘 어떤 장소에 이르러 먼저 가르치시고 기적 또는 행적을 보이시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에 더 무게를 두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병자들을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선한 사람들, 육체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지고 살피던 사람들, 어떻게 하면 더 도와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던 사람들입니다. 분명 이 사람들은 소문으로 또는 직접 눈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고서, 우리 고을을 방문하시기만 하면 병자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정작 기대하던 그날이 오자, 시간을 아끼기 위해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자들을 데려옵니다. 그리고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병자들을 대신하여 기도까지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 사람들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병자들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거저 치유의 은사를 받는 분위기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병자들도 병자들이지만, 이 선한 이웃들의 수고와 기도를 받아들여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을 것입니다. 선한 마을 사람들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행동으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였기에, 예수님도 이 마을 공동체를 위해 행동으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십니다.
이 마을과 구성원들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공동체, 주님을 중심으로 달려드는 활기찬 공동체를 목격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알아보는 노력을 앞세워야 합니다. 달리 말한다면,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 중심의 편협한 세계를 벗어나 이웃을 향하는 이타적 세계를 추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고, 이웃을 도울 수도, 이웃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마음을 조금 더 열어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살피는 가운데, 그들과 함께 주님을 향해 힘껏 달려가는, 기억에 남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드는 장면을 본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고 싶다고 간절히 원했다.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의 표현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구원과 치유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때때로 우리는 하느님을 내 필요를 채워주는 기계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기도하고 성사에 참여하면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쉽게 신앙을 포기하거나 불평하기도 한다. 이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단순히 “무엇을 얻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내 삶이 변화되는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병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장면을 해석하면서, 단순한 물리적 접촉이 아니라 믿음이 핵심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만진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만지는 자만이 치유된다.”(Homiliae in Matthaeum 33,3)
오늘 복음 속 군중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필요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주시는가가 아니라, 내가 그분을 닮아가는 삶이다. 믿음은 나를 변화시키고, 내 마음과 행동을 통해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이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참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돌려서, 그분의 뜻 안에서 스스로 변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Confessiones X,29) 성인은 또 참된 기도의 방향을 자주 강조했다. “너희가 하느님을 붙잡고 싶다면, 그분의 옷자락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붙잡아라. 말씀은 마음을 치유하고, 사랑은 영혼을 변화시킨다.”(Enarrationes in Psalmos 85,7) 우리 신앙의 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을 믿고 따르며, 내 삶 속에서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작은 선행을 통해 기쁨을 맛보고, 내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경험하며, 나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그저 예수님께서 나의 필요 채워주시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 삶 속에서, 가정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그분을 닮아가고 있는가? 나는 믿음을 통해 나 자신과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는가? 군중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간절히 잡았듯이, 우리도 그분 안에서 변화되기를 갈망하며, 삶 속에서 믿음을 실천하여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치유하시고,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기도합시다. “주님, 저의 마음을 여시고, 제 삶 속에 당신의 뜻이 살아 움직이게 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제 작은 손길과 마음을 통해 세상에 당신의 사랑이 퍼지게 하소서. 아멘.”
이병우 신부님_"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6,56ㄴ)
'예수님께 붙어 있자!'
오늘 복음(마르6,53-56)은 '예수님께서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많은 병자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옵니다. 그리고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활동의 정점이요 은총의 샘인 거룩한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 주변에서 영육의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성당으로 인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영적 육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전보다 더 풍요롭고 여유 있어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지금이지만, 아픈 사람들은 더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의 다른 피조물도 아파 신음하고 있습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가 아파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하느님의 또 다른 부르심을 받고 시작한 '가톨릭 우리농 담당 소임의 본질'은 '흙을 살리고, 땅을 살리고,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생명운동, 곧 생명 살리기'가 본질입니다.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장사 행위가 본질이 아니라, '죽어가는 지구를 살리고, 죽어가는 흙과 땅을 살리는 생명운동'이 본질입니다.
우리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다가가야 살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 옷자락 술에, 그분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곧 복음에 닿아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우리 모두의 부활을 위해 사람이 되시고(육화), 땀을 흘리시고(공생활),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갑시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그래서 다시 부활합시다!
(~1마카8,32)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1) 이 이야기를 예수님 쪽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당신께 간청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이라는 증언이고, 사람들 쪽에서
보면, 사람들이 아직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는 않고
병을 잘 고쳐 주는 예언자로만 생각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 또 사람들이 ‘영혼 구원’은 바라지 않고 ‘병의
치유’만 바라면서 몰려들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도 일부 있었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루카 8,2-3ㄱ).”>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만으로 병을 고치시는
분이고(마르 2,11), 어떤 경우에는
병자를 직접 만나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씀만으로 병을 고치시는 분입니다(마태 8,13).
그래서 꼭 예수님을 직접 만나야만, 또는 예수님의 옷에
직접 손을 대야만 치유의 은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라는 말은,
사람들이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2) 그런데 ‘믿음’에 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은총의 필수 조건일까?”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즉 병자가 당신을
안 믿고 있는데도 병을 고쳐 주시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고, 몰랐으니까 안 믿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순전히 자비심으로 그 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요한 5,6-9).
그리고 병을 고쳐 주신 다음에도 당신을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으셨고,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요한 5,14).
그래서 “믿음은, 은총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 응답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비와 은총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고,
믿음은 이미 받은 자비와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내가 간절하게 원하던 그것을 받지 못했더라도......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것만 은총인 것은 아닙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3) ‘기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여기서 ‘알고 계신다.’는,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신다.”입니다.
“청하기도 전에 주신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안 주려고 하시는 주님께 달라고 졸라대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항상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4)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인데,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병을 고친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옷자락 술’이 아니라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습니다.
복음서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사도 19,11-12).”
그 기적들은, 바오로 사도가 한 일도 아니고,
바오로 사도의 수건이나 앞치마가 한 일도 아닙니다.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하느님(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하신 일입니다.
만일에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서, 바오로 사도나 그의 수건과
앞치마를 섬긴다면, 그것은 미신이고 우상숭배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찾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우리 교회는 많은 ‘성물들’과 ‘상징물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신심에 도움을 주기 위한 보조 도구일 뿐입니다.
만일에 주님은 잊어버리고 그 물건에 대해서만 집착한다면?
사실 ‘참 신앙’과 ‘미신’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습니다.
<주님은 특정 장소나 특정 물건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누구나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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