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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5일 수원 교구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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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1-15 ㅣ No.187428

이병우 신부님_"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ㄴ) 

 

'나는 얼마나 간절한가!' 

 

오늘 복음(마르1,40-45)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간절한 마음(도움)을 드러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ㄴ)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ㄴ)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나병 환자의 간절함이 치유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던 그 간절한 믿음이 나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기적을 낳게 했습니다. 

 

"주님,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본기도)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때문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간절한 마음과 믿음인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로 향해 있었던 나병 환자의 간절한 마음과 간절한 믿음을 본받도록 합시다! 그래서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간절한 마음과 믿음을 드리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크고 작은 답답함(속박)에서 해방됩시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간절한 마음과 믿음의 드러남의 기도를 끊임없이 주님께 바치도록 합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11,9.13) 

 

(~ 1마카1,11)

 

 

전삼용 신부님_은총에는 항상 ‘순종’이라는 브레이크가 포함되어 있다 

 

 

 

 

 

찬미 예수님!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께 더 큰 은총, 더 많은 축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은총을 감당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팝의 여왕이라 불렸던 휘트니 휴스턴을 기억하십니까?

 

그녀는 '신이 내린 목소리(The Voice)'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압도적인 가창력을 선물 받았습니다.

 

가스펠 가수였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교회 성가대에서 그 재능을 꽃피웠을 때, 그녀는 세상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악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엄청난 성공과 부가 쏟아지자, 그녀의 삶에서 '절제'와 '신앙'이라는 브레이크가

 

고장 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약과 술, 무절제한 사생활이 그녀를 덮쳤고, 결국 그녀는 호텔 욕조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최고의 은총이 그녀를 파괴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슬픈 비극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면서 동시에 까다로운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이는 우리를 살리기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디즈니 영화 '환타지아'에 나오는 '마법사의 제자' 이야기는 이 진리를 아주 재미있고도 섬뜩하게 보여줍니다.

 

제자인 미키 마우스는 스승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물 긷는 일이 귀찮아 스승의 마법 모자를 쓰고

 

빗자루에게 주문을 겁니다.

 

"물 좀 길어와." 

 

 

 

빗자루는 기계처럼 완벽하게 일을 수행합니다. 우물에서 물을 퍼다가 독에 채웁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독이 다 찼는데도 미키는 빗자루를 멈추게 하는 주문, 즉 '통제권'을 모릅니다.

 

물은 넘쳐 홍수가 나는데 빗자루는 계속 물을 붓습니다.

 

다급해진 미키가 도끼로 빗자루를 찍어버리지만,

 

쪼개진 빗자루 조각들이 모두 일어나 더 많은 물을 퍼 나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실입니다. 인공지능(AI)과 과학 기술은 우리에게 엄청난 능력(은총)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멈출 수 있는 겸손과 윤리적 순종이라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스승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섣불리 휘두르는 기술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뒤, 아주 엄하게 명령하십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리고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여라."

 

이것은 예수님의 겸손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은총이 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처방전이었습니다.

 

모든 약에는 복용 방법과 주의 사항이 적힌 설명서가 들어있습니다.

 

설명서를 무시하고 약을 남용하면, 그 약은 더 이상 치료제가 아니라 독극물이 됩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며 '순종'이라는 사용 설명서를 함께 주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딱 하나 '선악과'만은 따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뱀은 유혹합니다.

 

"이걸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된다." 

 

 

 

오늘날 AI도 똑같이 유혹합니다.

 

"기술을 가지면 너희는 신처럼 전지전능해질 것이다."

 

하지만 선악과는 하느님이 인간을 골탕 먹이려고 만든 함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너는 주인이 아니라 피조물이다"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는, 인간을 보호하는 유일한 '순종의 표지' 였습니다.

 

그 표지를 훼손하고 순종을 버리자, 에덴은 실낙원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기술의 시대에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구약 성경의 삼손을 보십시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일 괴력을 은총으로 받았습니다.

 

하느님은 단 하나의 제동 장치를 거셨습니다.

 

"머리카락을 자르지 마라." 

 

 

 

이것은 머리카락에 마법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내 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입니다"라는

 

나지르인의 서약을 지키라는 순종의 요구였습니다.

 

삼손이 유혹에 넘어가 스스로 이 브레이크를

 

해제했을 때, 그는 두 눈이 뽑히고 연자매를 돌리는 비참한 노예가 되었습니다.

 

제약이 사라진 힘은 주인을 파멸시킵니다.  

 

 

 

피는 우리 몸 구석구석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피는 반드시 혈관이라는 좁은 통로(질서) 안에서만 흘러야 합니다.

 

피가 "나는 자유롭게 흐르고 싶다."라며 혈관을 터뜨리고 밖으로 나오면(불순종),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뇌출혈'이나 '내출혈'이라는 죽음이 됩니다.

 

은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지키고, 계명을 따르는 것은 하느님께 무언가를 뺏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인생이라는 자동차에 '브레이크'를 다는

 

행위입니다.

 

또 그런 행위를 할 때 ‘순종과 겸손’이 목표가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음도 알 수 있습니다.  

 

 

 

스포츠카 페라리는 시속 300km를 달릴 수 있는 엄청난 엔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고성능 차일수록 더 강력하고 민감한 브레이크가 필요합니다.

 

달리는 기능만 있고 멈추는 기능이 없는 차는 차가 아니라 흉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큰 재능이나 성공, 부를 주셨습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겸손과 순종이라는 고성능 브레이크도 함께 장착하셔야 합니다.

 

멈추라는 신호에 즉시 멈출 수 있어야 진짜 명품 인생입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에는 더 이상 기름을 넣어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운전자를 사랑하는 주유소 사장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달릴 수 있습니다.

 

은총에 합당한 그릇이 되기 위해 매일 겸손과 순종을 기르는 장치를 잘 점검할 수 있는 우리가 됩시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르 1,40-45: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에서 한센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고백한다. “스승님, 스승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이것은 단순한 청원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의 고백이다. 치유의 기적은 바로 이 겸손한 신앙에서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측은한 마음”(41절)을 가지셨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이다. 성 바실리오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손길은 인간의 더러움에 물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더러움을 씻어내는 정화의 힘이다.”(Homiliae in Psalmos 33,6) 

 

율법은 한센병 환자에게 손대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짐을 피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거룩한 손길이 닿는 순간, 부정은 정결로 바뀌고, 병은 치유로 변했다. 이것은 외적인 모습이나 사회적 낙인 때문에 사람을 멀리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신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 이 말씀은 단지 2천 년 전 한 사람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영혼이 죄라는 한센병에 물들었을지라도, 주님께 겸손히 고백할 때, 그분은 즉시 깨끗하게 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 돌아오는 데 두려워하지 마라. 너의 죄보다 크신 자비가 기다리고 계신다.”(Sermo 352,9) 

 

예수님께서는 치유된 환자에게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쳐라.”(44절) 하셨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율법을 존중하고 완성하시려는 예수님의 태도이다. 둘째, 치유의 은총은 개인적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확인되고, 감사의 제사로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가르쳐 준다. 겸손히 고백할 때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치유한다. 주님의 손길은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정화한다. 받은 은총은 공동체와 나누며 감사로 응답해야 한다. 

 

우리도 매일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40절) 그분의 손길이 우리의 죄와 상처를 정화하시어, 감사와 봉사의 삶으로 이끌어주시기를 함께 기도하여야 한다. 

 

김건태 신부님_함께하는 가엾은 마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환자 치유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한센병으로 불리기 전까지 나병은 불치의 병, 저주의 병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더욱이 전염되는 병으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접촉은 엄금되었으며, 나병환자로 판명되는 순간부터 공동체에서 추방되어 격리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레위 13장 참조). 그러니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무너지게 하는 무서운 병, 살아 있어도 죽은 목숨과 같은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가 치유를 간청하기 위해, 율법을 어기고,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 장면이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제자들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모두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그는 엎드려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초월하여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청원자의 간절한 마음을 고려하여 그의 글귀를 그대로 되풀이하시며 치유의 은혜를 내리십니다. 나병환자에게 몸이 깨끗하게 되는 육체적 치유 문제는 이제 별 의미가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이가 자신을 멀리하는 데도, 이분은 가엾은 마음으로 나를 만나 주시고 내 몸에다 손까지 대시니, 이토록 ‘함께하시며’ 내 마음의 깊은 병을 치유해 주시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주님은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다음, 사제에게 그의 깨끗해진 몸을 보여줄 것을 지시하십니다. 나병을 포함한 악성 피부병 감염 여부를 판단하여 격리, 곧 공동체로부터의 축출을 명하는 역할을 사제가 맡고 있었으므로, 치유 역시 사제로부터 확인을 받아 ‘정결한 사람’으로 판명되고 합당한 예를 올려야 공동체 합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레위 14장 참조). 치유 받은 사람은, 이 율법 부분에 관해서는 별도의 지시가 없었어도, 당연히 따랐을 것입니다. 공동체 합류, 무엇보다도 가족과의 재회가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이 율법을 환기하신 이유는, 율법 준수 이상으로 치유가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며, 이제부터 공동체의 새로운 구성원으로서 감사와 봉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체적인 병도 병이지만 나병환자가 정말 고통스러워했던 부분은 ‘소외’이며, 이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늘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가엾은 마음으로 함께함’입니다.

 

오늘 하루, 나병만이 아니라,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에게 다가가 함께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드러내고, 그들 또한 힘을 내서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힘쓰는, 보람 있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간절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40-45).”

 

1) 만일에 이 이야기가 42절의,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라는 말로 끝났다면, 이 이야기는 단순한

 

치유 기적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병자가 예수님을 믿고 청해서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라면 해설하기도 편하고,

 

강론하기도 편합니다.

 

“그 병자처럼 예수님을 잘 믿고, 예수님께 간청하자.” 라고

 

말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43절의 “단단히 이르셨다.” 라는 말과

 

44절의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 때문에, 단순한 치유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병자가 예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는(45절)

 

이야기 때문에, 치유 기적과는 별개로

 

복잡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또 치유 과정에 있는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과

 

“내가 하고자 하니” 라는 말씀도

 

이 이야기를 ‘특별한’ 이야기로 만들고 있습니다.

 

2)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은, 병자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말이긴

 

한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아직 잘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마르 1,32-34)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치유의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믿고 있었는데, 치유를 간청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청을 들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은,

 

즉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은 없는 모습입니다.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뒤의 9장에 나오는 ‘어떤 아이의 아버지’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자비’는 믿은 것 같은데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마르 9,22-23).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권능’을

 

모두 믿는 것입니다.

 

둘 중 하나라도 안 믿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뒤의 7장에 나오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여자의 간청을

 

들어 주기를 거절하셨습니다(마르 7,27).

 

우상을 숭배하고 있던 그 여자를 올바른 믿음으로

 

인도하려고, 즉 하느님만 믿는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려고 거절하신 것입니다.>

 

3) 여기서 ‘깨끗하게 하다.’ 라는 말은, 좁은 뜻으로는

 

‘나병의 치유’를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구원’을 뜻합니다.

 

당시에 나병은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병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병이었기 때문에,

 

‘나병의 치유’를 ‘깨끗하게 하다.’로 표현했습니다.

 

넓은 뜻으로는 모든 죄에서(더러움에서) 벗어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을 뜻하고,

 

그래서 ‘구원’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병자는 좁은 뜻으로 사용했고, 예수님께서는 넓은 뜻으로

 

사용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4)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는,

 

“너를 구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내가 원했던 일이다.

 

이제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간절함이나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를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 이야기를 보면,

 

병자가 당신을 모르는데도, 그래서 당신을 안 믿고 있는데도,

 

또 당신께 청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요한 5,5-9).

 

42절의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라는 말은,

 

“그의 나병이 치유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5)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라고

 

‘엄하게’ 명령하신 것은, ‘몸의 치유’에 대해서만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병자는 예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심각하게 방해했습니다.

 

‘믿음’이란 ‘순종’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많이 부족한 것이거나 없는 것입니다.

 

<병자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명령이 이해되지 않았겠지만,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고,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루카 5,5).>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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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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