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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16일 (금)
(녹)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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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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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26-01-14 ㅣ No.187411

특강 중에 대림은 말씀을 준비하는 시기라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성서는 사실(fact)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true)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보는 관점에서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사진을 보면 전쟁의 참상이 느껴집니다. 반면에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물을 주는 사진을 보면 상처를 입은 사람을 도와주는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진은 총을 멘 사람이 상처를 입은 사람을 부축하고 있었고, 다른 군인이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물을 주는 사진이었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사실은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사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진실이 가려질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는 율법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사실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안식일을 위해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실의 관점에서 보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성서는 과학책이 아닙니다. 성서는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는 책입니다.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한 민족이 왕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었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단군 신화의 곰과 호랑이 역시 사실 여부를 따지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뿌리와 가치관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설명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 의미를 발견하라는 초대입니다. 신화의 이야기는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신화를 통해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성서의 이야기에서 과학적인 원리를 찾으려 한다면 지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를 단죄했던 오류를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존재 이유를 찾는다면 성서는 존재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음악이 소리로 마음을 흔들고, 미술이 색으로 말하듯, 성서는 이야기와 상징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성서는 성령의 감도를 받은 이들이 자기 시대의 언어와 문화, 사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래된 말씀을 오늘의 삶에 아무 고민 없이 그대로 적용하려 하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우리를 옥죄게 됩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어떤 이들은 성서를 근거로 노예제를 정당화했습니다. 문자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마음, 곧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살리는 진실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해석의 기준은 교회와 교도권의 지침을 따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석의 중심을 이미 분명히 제시하셨습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하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규칙이 사람 위에 군림하는 순간, 그 규칙은 생명을 잃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세 편 만들어졌습니다. ‘명량, 한산, 노량입니다. 같은 장군, 같은 역사이지만 영화마다 이순신의 얼굴은 다릅니다. 어떤 영화에서는 결단의 장군으로, 어떤 영화에서는 고뇌하는 인간으로, 또 어떤 영화에서는 조용히 책임을 짊어진 지도자로 그려집니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전하는 복음서도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네 복음서는 서로 다른 시선으로 같은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교부들은 이를 상징으로 설명했습니다. 마태오는 사람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마르코는 사자로, 죽음을 이기신 왕의 권능을 전합니다. 루카는 소로,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신 희생을 강조합니다. 요한은 독수리로, 가장 높은 곳에서 진리를 꿰뚫어 보는 신비를 노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권능만을 기대하는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나를 살려 주시는 예수님입니까?

 

이러한 눈으로 오늘의 말씀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계약의 궤 안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사람을 쓰러뜨리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었습니다. 1독서에서 이스라엘은 궤를 앞세웠지만 패배합니다. 하느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복음에서 예수님의 권능은 한 사람의 삶을 살려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 한마디에 병든 몸뿐 아니라, 고립되었던 마음과 무너졌던 삶이 함께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한 사람만이라도 규칙이 아니라 자비로, 판단이 아니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권능이 머무는 곳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안에는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진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사실에 머무르지 않고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소서규범에 갇히지 않고 사랑으로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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