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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일 수원 교구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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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6-01-14 ㅣ No.187410

이병우 신부님_"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마르1,34)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르1,29-39)은 예수님께서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는 말씀'과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과 '전도 여행을 떠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마귀(악령)를 쫓아내십니다. 

 

'너를 살리는 일', 이것이 바로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셔야만 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궁극적인 일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1,35) 

 

'이 일', 곧 '우리를 이제와 영원히 살리는 일'에 충실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면에서 예전보다 크게 발전되었고, 더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이지만, 세상은 더 메말라 보이기도 하고, 또한 영적으로 육적으로 아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도 많아 보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입니다. '기쁜소식'입니다. 믿고 따라가는 이들을 살리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마르1,38) 

 

그래서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도 오셨습니다. 감사♡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결코 물리치지 않으시고, 다 받아주셨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자께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에 도구로 쓰시기 위해 부르시면, 우리도 사무엘처럼 응답합시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3,10ㄴ) 

 

(~ 에스9,28) 

 

 

 

전삼용_우리가 새벽에 매일 기도하는 이유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온 고을 사람들이 환호하며 당신을 붙잡는데도 "다른 고을로 가자"며 매정하게 떠나십니다.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은 분명 '좋은 일(Good Thing)'이고 보람된 일인데, 왜 굳이 그 성공의 자리를 떠나 낯선 고생길을 자처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묻기 전에, 우리가 왜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부터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식물학자이자 '땅콩 박사'로 위인전에 등장하는 조지 워싱턴 카버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천재적인 재능으로 당대 최고의 농학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그를 스카우트하려 했습니다.

 

에디슨은 카버에게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연봉 10만 달러(현재 가치로 수십억 원)를 제안했습니다.

 

"금액은 당신 마음대로 쓰시오.

 

최첨단 연구실을 줄 테니 나와 함께 일합시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것은 거절하기 힘든 제안입니다.

 

부와 명예가 보장된 삶, 내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 이것은 분명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Good Thing)'입니다.

 

하지만 카버 박사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리고 대신 그가 선택한 곳은 앨라배마의 가난한

 

흑인 학교인 터스키기 연구소였습니다.

 

그곳은 월급은커녕 실험 장비도 제대로 없어 쓰레기장을 뒤져 병을 주워 써야 하는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좋은 꽃길'을 버리고 '옳은 가시밭길'을 가게 했을까요?

 

비밀은 그의 새벽에 있었습니다.

 

카버 박사는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적인 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평생 동안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숲으로 들어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자연은 가장 위대한 스승이며, 남들이 잠든 그 고요한 시간에 하느님은 나에게 그날의 계획과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만약 내가 에디슨에게 갔다면 돈은 많이 벌었겠지만, 내 동족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나는 내 백성을 살리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새벽마다 확인했기에 행복했습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낡은 양복을 입고 지냈지만, 땅콩 하나로 300가지가 넘는 발명품을 만들어내며 남부의 경제를 살려냈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는 명성에 부를 더할 수 있었으나, 그 둘을 다 마다하고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것에서 행복과 명예를 찾았다."

 

'좋은 일'보다 '옳은 일'을 선택했을 때 영혼이 얼마나 기쁜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경영학자 짐 콜린스는 그의 저서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의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좋은 것(Good)은 위대한 것(Great)의 적이다."

 

수많은 사람과 기업이 실패하는 이유는 그들이 엉망이어서가 아닙니다.

 

적당히 '좋은 상태'에 만족하고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됐어", "사람들이 좋아하잖아"라는 안도감이 하느님이 주신 위대한 사명으로 나가는 길을 막아버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의 환호(Good)를 뿌리치고 떠나신 것은, 인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명(Right)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에 예수님께는 더없는 행복이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위대한 영혼들은 하나같이 이 '좋은 유혹'을 이겨내고 '옳은 행복'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좋은 것을 버리고 고생길을 택한 이들은 불행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와이의 쾌적한 본당을 버리고 나병 환자들의 섬 몰로카이로 들어간 성 다미안 신부님을 보십시오.

 

결국 그도 나병에 걸려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향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형님, 저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교사입니다.

 

제 몸은 썩어가지만 제 마음은 천국을 맛보고 있습니다."

 

건강한 육체라는 '좋은 것'을 포기하고 병든 형제들과 하나 되는 '옳은 일'을 택했을 때, 그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그렇다면, 눈앞의 달콤한 '좋은 일'을 뿌리치고 고독한 '옳은 일'을 선택하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왜 우리는 기도를 해야만 할까요?

 

예수님은 그 답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힘은 '새벽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귀를 멀게 하기 전에, 성공의 달콤함이 마음을 무디게 하기 전에, 주님은 새벽같이 일어나 하느님 아버지와 독대하셨습니다. 

 

우리가 새벽에 기도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좋은 일'보다 '옳은 일'을 선택했을 때 맛보았던

 

그 행복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편안하고 좋은 것만 찾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면, 고생스러워도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영혼을 얼마나 춤추게 하는지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사람들은 "기도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에 환자를 더 돌보는 게 효율적이고 좋은 일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단호했습니다.

 

그녀와 수녀들은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1시간 이상 성체 조배를 했습니다. 

 

"우리는 사회복지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한복판에 있는 관상 수도자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새벽에 예수님의 사랑을 충전하지 않고 일만 했다면, 그들은 금방 지쳐서 짜증 내는 노동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새벽 기도가 있었기에 그들은 50년 넘게 미소를 잃지 않고 옳은 일을 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전쟁 당시 수많은 사람이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라고 압박했습니다.

 

그것이 피를 덜 흘리는 '좋은 일'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링컨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성경을 펴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내 지혜가 부족함을 너무나 잘 알기에, 압도적인 확신을 가지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 곳이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새벽마다 하느님의 뜻을 물었기에 그는 '적당한 타협'이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노예 해방'이라는 옳은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좋은 일'은 무엇입니까?

 

"이 정도면 됐어, 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라는

 

안락함이 혹시 하느님이 부르시는 '위대한 사명'과 그 안에서 누릴 참된 행복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안락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벽 4시의 숲으로 나가야 합니다.

 

몸은 편하지만 영혼이 시들어가는 곳을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내 힘으로는 못 떠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새벽'이 필요합니다.

 

하루 중 단 10분이라도 좋습니다.

 

세상의 소음을 끄고 하느님과 단둘이 만나는 '외딴곳'을 마련하십시오. 

 

우리가 매일 기도하는 이유는 의무감 때문이 아닙니다.

 

좋은 일보다 옳은 일을 선택했을 때 찾아오는 그 벅찬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행복을 아는 사람은 기도를 멈출 수 없습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르 1,29-39: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기가 가셨다.”(31절).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는 늘 하느님 앞에서 치유가 필요한 존재이며, 우리의 영혼은 죄와 나약함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와 같다. 주님은 그런 우리 곁으로 친히 오시어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 그녀의 손을 잡으시니, 열이 사라졌다. 곧 은총의 손길이 영혼을 붙잡을 때, 죄의 열기가 사라지는 것이다.” (Sermo 88,3) 

 

우리는 혼자 힘으로 죄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손을 잡아주실 때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일어서게 된다. 또한 치유받은 시몬의 장모는 곧 “그분을 시중들었다.”(31절) 한다. 주님의 은혜는 언제나 ‘봉사’로 이어진다. 단순히 나를 위한 치유에서 그치지 않고, 받은 은총을 이웃을 위해 나누는 삶으로 열매를 맺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가르친다. “은총은 받기만 하고 나누지 않으면 곧 메말라 버린다. 치유받은 그녀가 곧 봉사에 나선 것은 은총의 본질을 보여 준다.”(Hom. in Matthaeum 25,3)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아직 캄캄할 때”(35절) 외딴곳으로 나가 기도하셨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도 아버지와의 친밀한 대화를 통해 사명을 이어가셨다. 이는 기도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자리임을 보여준다. 성 바실리오는 말한다. “기도는 단지 바라는 것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되는 수단이다.”(De Spiritu Sancto 12,27)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것을 위해 왔다.”(38절) 말씀하신다. 구원의 빛은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확장된다. 교회 역시 이 파스카적 사명을 이어받아, 세상의 모든 구석구석으로 파견된 공동체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선언한다. “교회는 본성상 선교하는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빛은 모든 민족에게 비추어야 한다.” (선교 2항)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일깨워 준다. 주님의 손길에 자신을 내어 맡길 때 우리는 참으로 치유된다. 받은 은총은 반드시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 기도 안에서 힘을 얻어 우리는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지닌다. 우리도 시몬의 장모처럼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 사랑과 봉사로 응답하며, 기도 안에서 힘을 얻어 복음을 증언하는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김건태 신부님_복음 선포자의 모습

 

엊그제 복음 말씀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일정을 살펴보면, 지나칠 정도로 분주하게 움직이시는 주님의 모습이 인상적이며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는 말씀으로 복음 전파의 길에 들어선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고(엊그제 복음),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어제 복음),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에서 나오셔서 열병에 걸린 시몬의 장모와 함께 그 고을의 모든 병자를 치유해 주신 다음, 이튿날 이른 새벽에 외딴곳으로 가서 기도하시고, 줄곧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십니다. 일자로 계산하면, 단 이틀 동안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세 가지 점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활동적인 분주하신 모습입니다. 활발히 움직이시는 모습은 어느 정도 현대인들의 분주한 일상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일의 내용이나 목적 또는 방법은 다를 수 있어도, 활동적인 모습만큼은 근접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때로는 지친 몸을 끌고 이리저리 뛰어야 하고, 이러저러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하고, 여기저기서 쇄도하는 부탁에 화답하기 위해 내외적으로 고심하며 애쓰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이들은 그 고을의 사람들, 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자들도 병자들이지만, 이 선한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더욱 분주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다음, 멈출 줄 아시는 모습입니다. 다양한 활동을 펼치시면서도, 예수님은 또 다른 중요한 일을 이루기 위해 잠시 멈추십니다. 하나는 우정을 위한 멈춤이며, 다른 하나는 기도를 위한 멈춤입니다. 우정 차원에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을 방문하여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심에는 고을 사람들의 역할도 큽니다. 고을 사람들의 우정까지 내다볼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별도의 기도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라는 표현으로 보아, 수면 시간이나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당신의 말씀과 행적이 성부의 뜻에 부합하는지를 늘 살피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해야 할 일을 내다보시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항상 의식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갈릴래아에서의 복음 전파를 계획하셨다면 다음은 다른 지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시며, 몇몇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데 성공하셨다면 다음은 ‘길 잃은 양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신다는 점입니다. 계획대로 다 이루셨다 하더라도, 쉼 없이 아직 남아 있는 일을 내다보신다는 점입니다.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구세주로서의 모습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 활동적인 모습, 멈출 줄 아는 지혜, 해야 할 일들을 늘 마음에 새기며 구원사업을 펼치셨던 열정을 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본받아야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합니다. 혹시 그대로 따라 하지는 못하더라도, 고을의 그 선한 사람들처럼 주님의 도움이 절실한 이웃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는 여유는 지녀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면 더욱 자주 주님을 뵙게 될 것이며, 자연스럽게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은 갖추게 될 것입니다. 욕심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주님을 닮아가는 신앙인의 모습 희망하며 활기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29-39).”

 

1)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증언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는 분이시고, ‘병고’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과

 

“예수님은 몸의 병이나 고쳐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을 주려고 오신 메시아” 라는 증언...

 

이 두 증언을 겉으로만 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또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러나 병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병의 치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체험하게 되고,

 

그 체험에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힘을 얻기 때문에,

 

‘병의 치유’와 ‘구원’은 모순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병자 치유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2) 정말로 아픈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도 없고,

 

심하면 기도할 힘도 잃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기도하라는 말만

 

하는 것은 ‘사랑 없는’ 일이고 잔인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픈 사람에게 기도하라고 강요하지 말고, 안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4-16).”

 

그래서 30절의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라는 말과 32절의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라는 말은, 중요한 말입니다.

 

병자들 가운데에는 자기 발로 걸어서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스스로 움직일 힘이 없는 병자들은

 

가족이나 친구나 친지가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아픈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리고 아픈 사람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것, 그것은 모두

 

중요한 ‘사랑 실천’입니다.>

 

3)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복음 선포를

 

하려고 사람들을 불러 모은 일이 아니라,

 

그 일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고,

 

병자 치유 같은 ‘일’을 통해서도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사업들도

 

그 일 자체로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합니다.

 

신자가 될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4)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마귀들이 당신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금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안 믿는 마귀들에게는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그것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5)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다른 고을로 가시지 말고 이곳에 계속 머물러 계시라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간청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몸의 치유’만을 원했음을 나타내고,

 

또 예수님을 독점하려고 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은 한 고을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모든 곳으로 전해져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복음과 구원은 아무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누려야 합니다.

 

<교회는 ‘외부인 출입금지’ 시설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모든 사람의 ‘안식처’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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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1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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