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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5일 수원 교구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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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루카 신부님_<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1.5)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
'회개와 하느님의 나라!'
오늘 복음(마태4,12-17.23-25)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말씀'과 '예수님과 군중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과 그 내용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공생활은 '예수님의 신성(하느님)이 드러나는 예수님의 활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와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4,23)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 말씀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이렇게 들려왔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회개의 선물(결과)'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이며,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나라'(루카4,18 참조)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14,17)
우리는 종종 종속되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인생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는 것에 종속된, 돈과 권력과 명예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이제와 영원한 부활(생명.평화.기쁨.하느님의 나라)을 믿고 희망하면서 이를 이루겠다고 약속한 이들도.
하느님이신 예수님처럼 살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노력 안에서 찾아오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여전히 세상 것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갇혀 있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회개'는 이것으로부터의 '탈피'입니다.
'세상 것에 종속된 삶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 그래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유딧14,10)
조욱현 신부님_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복음: 마태 4,12-17.23-25: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물러가신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피신하신 것은 단순히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은 정해진 때에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은 아버지의 구원 계획 속에서만 완성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는 제자들에게 유혹의 위험 앞에서 무턱대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있을 때 피하라는 지혜를 가르치신 행동이기도 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주해하며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유혹을 두려워하셔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기 위해 피하셨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당신이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보여주신 것이다.”(In Matthaeum Homiliae 14,2) 즉, 예수님은 인간이 유혹을 이겨내도록 길을 열어주시는 스승이시다.
예수님께서 정착하신 곳은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곧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큰 빛을 본 백성”(이사 9,1-2)이 사는 땅이었다. 이 지역은 과거 북 왕국의 멸망과 함께 가장 먼저 이방인에 넘어간 지역이자, 어둠과 수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가장 먼저 구원의 빛이 비추게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큰 빛”을 이렇게 해석한다. “큰 빛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신다.”(Enarrationes in Psalmos 36,1) 빛이신 그리스도는 단순히 지식의 빛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그림자를 몰아내는 구원의 빛이다.
예수님의 첫 설교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동일하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절) 이는 요한의 사명이 예수 안에서 이어지고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하늘 나라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새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늘 나라는 지금도 우리 안에 시작되었으니, 우리가 사랑할 때 그 나라가 우리 안에 세워진다.”(Homiliae in Evangelia 1,17) 하늘 나라는 우리 안에서 현존하는 하느님의 통치이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모든 질병과 고통을 치유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23절). 이는 그분의 공생활이 세 가지 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말씀의 선포: 무지와 오류에서 해방; 치유의 표징: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영혼의 상처 치유; 하늘 나라의 선포: 하느님의 새로운 통치 시작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곧, 주님의 치유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구원의 사건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도 세 가지를 초대한다. 빛으로 나오기: 무지와 죄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고, 말씀의 빛을 받아들이는 것; 회개하기: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믿고, 하느님의 사랑 앞에 마음을 돌이키는 것; 주님을 따르기: 예수님을 따라 고통 속에서도 그분께 나아가 죄의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교회 헌장 9항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당신의 빛으로 모으시어, 세상의 희망이 되게 하셨다.” 우리 또한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를 때, 세상 속에서 그분의 빛을 반사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절) 말씀하신다. 빛이신 그분께 나아가 죄의 용서를 청하자. 그분 안에서 치유와 평화를 얻고,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가자. 그리고 우리 삶이 그분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거울이 되게 하도록 하자.
김건태 신부님_하늘 나라
마태오 복음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하는 소위 성취인용문(成就引用文)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1,23; 2,15.17.23; 3,3; 4,14; 8,17 등등). 마태오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구약)성경에 친숙했던 신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저술하다 보니, 구약성경에 예고된 메시아가 바로 이분, 예수 그리스도임을 입증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러한 어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오에게 예수님에 관한 사건과 행적은 모두 구약성경에 이미 예고된 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모든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메시아이시고 약속의 실현이라는 표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분은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당신의 사명을 펼치기 시작하십니다. 왜 이곳을 당신의 활동 거점으로 삼으셨을까? 갈릴래아(히브리어로 갈릴)는 하나의 지명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에 앞서, (이방인)지역을 뜻하는 일반명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북부 변방에 위치하고 있어, 상당수의 이방인이 자주 드나들거나 거주했기에 이 지역을 갈릴래아라 낮추어 부르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 지역은 즈불룬 지파와 납탈리 지파의 영토였는데, 역사적으로 이 두 지파는 천한 하위지파로 취급되기 일쑤였습니다. 첫 선교활동 거점으로서의 갈릴래아라는 지명에는 이처럼 이방인 선교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불러 모아 선교사명을 내리신 곳도 바로 이 갈릴래아라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마태 28,16-20).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는 첫 말씀으로 복음을,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회개는 죄로부터의 돌아섬이라는 좁은 의미를 뛰어넘어, 생각과 의식을 포함한 행동의 변화,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마음을 바꾸면, 삶을 바꾸면 하늘 나라에 다가설 수 있다는 말씀이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그야말로 복음(福音)입니다. 구원은, 하늘 나라에 들어섬은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 전적인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도리가 바로 회개, 마음과 삶의 변화인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이 한 해, 시작부터 그리고 온전히 나 자신을 바꾸겠다는 다짐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두신 하늘 나라에 더욱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는 한 해, 이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은 없다는 일념으로, 그 안에서 신앙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한 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전삼용 신부님_찬미 예수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내고, 전례력은 다시 일상의 시간으로 흘러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본격적으로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십니다. 그 첫 일성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여러분, '회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가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씻고 깨끗해지는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자신의 처참한 어둠을 직시하는 자리로 내려앉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음을 뼈저리게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손을 뻗는 그 절박한 상태,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제가 영적으로 깊은 어둠 속에 있을 때였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지조차 희미하고, 제 영혼은 갈길 몰라 방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제 손에 잡힌 지푸라기 하나가 있었습니다. 바로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책이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 책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어떤 이들은 사적 계시라며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물에 빠져 숨이 넘어가는 저에게 그런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책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시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 빛에 이끌려 신학교라는, 세상이 보기엔 또 다른 어둠의 골짜기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진짜 빛'이신 주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그 책은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본당의 풍경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많은 분이 성당에 오시지만, 정작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왜일까요? 그분들이 '물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육지에 서 있는 심판관'의 자세로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은 끊임없이 '우편배달부'를 평가합니다. "저 신부님 강론은 너무 길어." "저 수녀님은 인상이 왜 저래?" "성경 공부는 지루해." "이 책은 저자가 별로야." 편지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은 우편배달부의 손때를 보지 않습니다. 배달부의 손톱에 때가 끼었든, 옷이 좀 남루하든, 인상이 험악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그가 전해주는 '편지', 그 안에 담긴 기쁜 소식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당원이었던 오스카 쉰들러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성인군자가 아니었습니다. 술주정뱅이에, 여자를 밝히는 바람둥이였고, 뇌물을 일삼는 속물 사업가였습니다. 겉만 보면 영락없이 '더러운 우편 배달부'였습니다. 하지만 가스실로 끌려가던 유대인들에게 쉰들러의 사생활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쉰들러를 도덕적으로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죽음이라는 어둠 속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쉰들러의 인격이 아니라, 그가 작성한 '리스트(생명의 편지)'에 내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뿐이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구조자의 손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시베리아 유형소라는 지옥 같은 어둠 속에 던져졌을 때, 그곳은 살인자와 강도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12월 당원(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그에게 쥐여준 것은 낡고 때 묻은 『신약 성경』 한 권이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책이 너무 더럽군. 종이 질이 나쁘군." 하며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더러운 책을 닳도록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고백합니다. "그 지옥 같은 감옥, 그 더러운 책 속에서 나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당에 와서도 말씀과 성체를 붙들지 못하고, 사제와 이웃을 판단하고 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죄의 바다에 빠져 죽어가고 있다는 '자신의 처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육지에 안전하게 서 있다고 착각하기에, 우편 배달부의 손때나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사람은, 타인을 판단할 겨를이 없습니다. 대신 오직 나를 살리는 '말씀'과 '성체'에만 시선을 고정합니다. 여기, 자신이 처한 어둠 속에서 오직 빛만을 바라본 한 사형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957년 프랑스, 자크 페슈(Jacques Fesch)라는 27세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은행 강도를 저지르다 경찰관을 살해한 흉악범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살인마'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 역시 감옥이라는 깊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죄책감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의 끝에서 지푸라기처럼 십자가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감옥을 수도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사형 집행이 다가올수록 그는 공포에 떠는 대신, 주님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전율했습니다. 처형 5시간 전, 그는 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5시간 후면 나는 예수님을 볼 것이다! 마지막 날, 나는 춤을 추러 가는 것이 아니다... 내 눈은 오직 십자가에!" 단두대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그는 사형 집행인의 손(우편 배달부)을 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죽을 죄인이라는 '처지'를 뼛속 깊이 알았기에, 오직 자신을 구원할 '십자가(편지)'만을 뚫어지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교회는 지금 그를 복자품에 올리기 위해 시복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우리는 지금 물에 빠진 사람입니까, 아니면 뒷짐 지고 배달부의 손때를 지적하는 구경꾼입니까? 나의 처지를 아는 것, 나의 절박함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빛을 만나는 첫걸음입니다.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우선입니다. 멜 깁슨이 결국 자신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임을 고백하며, 영화에 예수님의 못을 박는 군사의 손으로만 등장한 것이 회개의 예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절대 말씀과 성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읽고 묵상하고 조배합니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분이 바로 '거지 성인'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입니다. 그는 평생을 씻지 않고 넝마를 걸친 채 로마의 콜로세움 폐허에서 노숙했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냄새나고 더러운, 영락없는 걸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피했고, 때로는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하지만 라브르는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단 한 번도 판단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은 오직 한 곳, 성당의 '감실'에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성당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행복해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인정도, 자신의 명예도 필요 없었습니다. 오직 '성체'라는 생명의 빵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그가 로마의 길거리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로마의 아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외쳤습니다. "성자가 돌아가셨다! 거룩한 거지가 돌아가셨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고 외치십니다. 회개란 표를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사제의 강론이든, 우연히 집어 든 신심 서적이든, 혹은 밉상인 이웃의 한마디든, 그 '배달부의 손때' 너머에 있는 주님의 붉은 '편지'를 읽어내려고 노력해 봅시다. 그 지푸라기가 여러분을 빛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체가 생명이 될 때 생명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아멘.
송영진 신부님_<“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 4,12-17).”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마태 4,23-25).”
1) 이 이야기는, “생명의 빛이신 주님께서 오셨다.” 라는
선포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 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 근처 어딘가에 가까이 와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루카 17,21).
그래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회개해서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어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혼인 잔치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2,11-13).”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를 바란다면,
혼인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묵시록에는 겉옷을 깨끗이 빨아서 입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3-14)”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권한을 받고,
성문을 지나 그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묵시 22,14).”
혼인 예복으로 갈아입는다는 말과
겉옷을 깨끗이 빨아서 입는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옷’은 ‘삶’을 뜻합니다.
그래서 혼인 예복으로 갈아입는 것은, 또는 겉옷을
깨끗이 빨아서 입는 것은,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삶’,
또는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게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1-24).”
바오로 사도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생활만 바꾸지 말고,
완전히 변화된 ‘새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회개’는, 또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일’은,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날마다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새 인간’이 되려면, 또는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빛’을
잘 받으려면, 자기 안에 있는 ‘낡은 것’과
‘어둠’을 잘 찾아내야 하고, 그것을 잘 버려야 합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3ㄴ)”
이 말씀은,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빛’이라고 착각하면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또 너무 자주 ‘회개’를 말하면서,
형식적인 회개나 ‘거짓 회개’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어둠으로 인정하지 않고
“이것은 어둠이 아니다.” 라고 우기면,
‘새 인간’이 될 수 없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빛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회개’는 자기 안에 있는 부끄러운 것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끄럽다고 덮어버리면, 참된 회개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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