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 말씀이 사람이 되시다 / 탄생의 완성)
말씀이 살이 되어
#성탄 #강생 #육화 #생명 #빛 #받아들임
요한복음 1,1-18은 성탄의 신비를 가장 깊은 언어로 전한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이 말씀은 관념이 아니었다. 철학이 아니었다. 이 말씀은 살이 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하느님의 말씀이 육체를 입으셨다. 영원하신 분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몸을 받으셨다.
이것이 성탄의 핵심이다. 말씀의 육화, 강생의 신비.
아기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9개월을 보내셨다.
수정란으로 시작하여, 배아가 되고, 태아가 되어 손가락이 생기고, 심장이 뛰고, 눈을 뜨고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오신 분.
하느님은 그 모든 과정을 거치셨다. 건너뛰지 않으셨다. 생명의 여정 전체를 통과하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말한다. 생명의 모든 단계가 거룩하다고. 임신의 모든 순간이 하느님의 시간이라고.
태중에 계신 예수님도 이미 예수님이셨다. 보이지 않을 때도,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으셨을 때도 그분은 이미 구세주셨다.
만약 우리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 생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태중의 예수님도 부정하는 셈이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복음은 말한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그 생명은 처음부터 빛이었다고.
모든 생명이 그렇다. 잉태된 순간부터, 그 생명은 빛을 품고 있다. 아직 세상이 알아보지 못해도, 아직 환영받지 못해도, 그 안에는 이미 빛이 있다.
세상은 때로 생명을 선택의 대상으로 만든다. 원하면 받아들이고, 원치 않으면 거부할 수 있는 것으로.
하지만 복음은 다르게 말한다.
"그분께서 당신의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인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예수님도 거부당하셨다. 세상에 당신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 베들레헴의 여관들은 문을 닫았고, 마구간만이 그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거부가 그분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했다. 환영받지 못함이 그분의 존엄을 흔들지 못했다.
그분은 여전히 말씀이셨고, 여전히 빛이셨고, 여전히 생명이셨다.
만삭에 이른 태아를 생각한다.
눈을 뜨고, 소리를 듣고, 엄마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생명. 며칠만 기다리면 세상으로 나올 존재.
그런데 우리 사회는 묻는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 선택할 수 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산도를 통과하는 그 짧은 순간이 생명의 가치를 결정하는가.
안과 밖, 그 경계가 존엄의 기준인가.
복음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생명의 전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오셨다. 임신, 탄생, 성장, 그 모든 단계를 거룩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완전히 자란 어른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 아기로 오셨다. 연약하고, 의존적이고,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그리고 그 연약함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율법은 선을 긋는다. 이것은 허락되고, 저것은 금지된다. 이 시기까지는 가능하고, 저 시기부터는 불가하다.
하지만 은총은 다르다. 은총은 경계를 넘어 흘러넘친다. 자격을 따지지 않고 주어진다.
예수님의 탄생이 그랬다. 아무도 준비하지 않았지만 오셨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선물로 주어졌다.
모든 생명이 그렇다. 계획했든, 계획하지 않았든, 환영 받든, 거부당하든, 생명은 언제나 은총으로 온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성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태어남은 완성이 아니라 여정의 출발이다.
아기 예수님은 태어난 후에도 성장하셨다. 젖을 먹고,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익히셨다. 30년을 준비하신 끝에 비로소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생명은 그렇게 긴 여정이다. 태어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한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평생의 헌신이다.
아기를 낳는 것만이 아니라 키우고, 사랑하고, 함께 걸어가는 것.
그렇기에 우리는 생명을 옹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태어난 생명을 지지하고, 보호하고, 동행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홀로 두려움 속에 남겨지지 않도록,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경제적 압박에 짓눌리지 않도록,
장애를 가진 아이도 환영받고 사랑받는 사회가 되도록.
생명 존중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다. 구체적인 연대와 지지다.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이 찾아왔다. 동방박사들이 선물을 가져왔다. 시메온과 한나가 기도로 받아들였다.
생명은 공동체 안에서 환영받을 때 온전히 빛을 발한다.
"한 처음부터 계신 분, 우리가 들은 분, 우리 눈으로 본 분, 우리가 바라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분"
요한은 말한다. 말씀이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느님이 육체가 되셨다. 영이 살이 되셨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를 경시할 수 없다. 몸을 도구로 취급할 수 없다.
모든 살은 거룩하다. 모든 육체는 하느님의 거처가 될 수 있다.
태중의 작은 몸도, 만삭의 큰 몸도, 갓 태어난 연약한 몸도, 모두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다.
성탄은 기쁨의 날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찰의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생명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누구를 환영하고, 누구를 거부하는가.
마구간밖에 자리가 없었던 그날처럼, 오늘도 수많은 생명이 문밖에 서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이유로,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성별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 문장이 오늘도 반복되지 않기를, 우리가 문을 여는 사람들이 되기를.
"그분에게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성탄의 선물은 이것이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주어진 은총.
모든 생명도 그렇다. 자격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진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불편해도, 생명을 환영하는 것.
그것이 성탄을 사는 방식이다.
대림의 기다림은 끝났다. 빛이 왔다. 말씀이 살이 되었다.
이제 우리의 몫은 그 빛을 반사하는 것,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
생명이 생명으로 존중받는 세상, 연약함이 거부가 아니라 환대의 이유가 되는 세상, 모든 아이가 환영받는 세상.
그것이 성탄의 약속이고, 우리가 향해 가야 할 평화의 길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이 신비 앞에서 우리는 무릎 꿇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생명을 받아들이겠다고. 연약함을 보호하겠다고. 함께 걸어가겠다고.
성탄의 기쁨이 우리의 헌신으로 이어지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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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로 대림-성탄 연재를 마칩니다.
생명을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함께 걸어가는 여정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