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5일 (목)
(백) 주님 성탄 대축일 - 밤 미사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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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수원 교구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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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2-24 ㅣ No.187018

이병우 신부님_"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루카1,67) 

 

'기쁨의 찬가를 드리자!' 

 

오늘 복음(루카1,67-79)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벙어리에서 해방된 기쁨을 노래하는 '기쁨의 찬가'입니다. 교회는 즈카르야의 이 찬가를 매일 아침 성무일도 때 바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쁨의 찬가(68-75절)와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언(76-79절)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루카1,68ㄱ) 

 

즈카르야는 먼저 기쁨의 찬가를 통해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다윗 집안에서 힘센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게 하시어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게 하셨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 

 

이에 대한 대답으로 즈카르야는 태어난 아들 세례자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이며, 구원자이신 예수님보다 앞서 와 그분의 길을 닦아야 하는 그의 소명을 예언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1,78-79)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성탄이 가까웠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예수님, 낮은 곳에 낮은 자의 모습으로 태어나시는 예수님께 우리도 기쁨의 찬가로 찬양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잘 맞이할 수 있도록 회개하는 자녀들이 됩시다! 나의 회개가 그분께서 오실 길을 닦아드리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해방되고, 평화의 길, 십자가의 길을 기쁘게 그리고 겸손하게 걸어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보라, 이제 때가 차,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다."(입당송) 

 

(~ 토빗11,18) 

 

전삼용 신부님_어둠 속(Nothing)에 앉아 있어야 별(Everything)이 보입니다 

 

찬미 예수님!

마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를 보면 아주 오만한 천재 외과의사 스티븐 스트레인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손이 곧 신의 손이라 믿었습니다. "나는 죽음을 통제한다." 그는 오만했고, 당연히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곧 빛이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빗길 교통사고로 양손의 신경이 완전히 끊어집니다.

전 재산을 털어 수술해도 고칠 수 없게 되자 그는 폐인이 됩니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에인션트 원이라는 스승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그를 눈보라 치는 에베레스트산 한복판에 덜컥 버려두고 떠납니다.

죽음의 공포, 철저한 고립,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그 절체절명의 순간 스승은 말합니다.

"너에 대한 것이 아니다(It's not about you)." 

 

그가 자신의 자아(Ego)를 내려놓고 항복했을 때, 비로소 마법의 힘(은총)이 그에게 들어왔습니다.

그는 손을 잃음으로써(Nothing), 세상을 구하는 소서러(Everything)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가 부르는 노래, '베네딕투스'는 바로 이 과정을 겪은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찬가입니다.

즈카르야는 사제였습니다.

평생 하느님을 섬겼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벙어리'로 만드셨습니다.

열 달 동안의 침묵, 그것은 즈카르야의 자아를 깨뜨리는 에베레스트산이었습니다.

그가 말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이 주인이라는 착각을 잃고 'Nothing'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눈에 "떠오르는 별"이신 구세주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빛인 줄 착각하는 이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언가 선택하고 할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바로 이런 이들을 'Nothing'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어둠 속에 앉히는 것, 그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미국의 변호사 호레이쇼 스패포드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시카고 대화재로 전 재산을 잃고, 설상가상으로 네 딸을 배 사고로 모두 잃었습니다.

그는 딸들이 수장된 대서양 한가운데를 지나가게

됩니다.

인생 최악의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실에서 절규하던 그에게 갑자기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밀려왔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펜을 들어 찬송가를 썼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내 영혼 평안해(It Is Well With My Soul)." 가장 깊은 슬픔의 어둠 속에서 그는 부활의 소망이라는

가장 밝은 빛을 보았습니다. 

 

칠레 광부 매몰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하 700미터, 빛 한 줄기 없는 갱도에 33명의 광부가 69일간 매몰되었습니다.

섭씨 32도의 무더위와 암흑 속에서 그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모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구조된 후 작업반장 우르주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우리 33명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34번째 인물이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지상의 빛이 사라진 지하 700미터의 절대 어둠 속에서 그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임마누엘)을 만났습니다.

왜 우리는 어둠 속에 앉아야 할까요? 

 

천문학자들은 별을 관측하기 위해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 같은 오지로 떠납니다.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 즉 '광공해(Light Pollution)'가 있는 곳에서는 은하수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성공, 칭찬, 자만심이라는 인공조명이 너무 밝게 켜져 있으면, 베들레헴의 작은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어둠 속에 앉혀 이 광공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스스로 빛나기를 멈추고 자신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 사람(사막)만이 구세주를 발견합니다. 

 

아일랜드의 사도 성 파트리치오(패트릭)도 이 과정을 겪었습니다.

16살의 귀족 소년이었던 그는 해적에게 납치되어 노예가 됩니다.

6년 동안 낯선 땅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양을 치는 고독 속에 버려졌습니다.

부모의 품을 떠난 끔찍한 어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백록에서 말합니다.

"그 고독 속에서 나는 하루에 백 번도 넘게 기도했다.

그러자 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불타올랐다." 그 6년의 광야 생활이 그를 'Nothing'으로 만들었기에, 그는 아일랜드 전체를 비추는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제로(0)'로 만드는 예언자를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닭 울음소리'가 바로 그 예언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지킬 수 있는 빛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었을 때, 그리고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자만심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의리 있는 수제자가 아니라, 겁쟁이 배신자, 철저한 'Nothing'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무(無)의 체험 후, 베드로는 통곡의 기도를 바쳤고 진짜 반석이 되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에게는 엘리사 예언자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아람의 군사령관 나아만은 자신의 지위와 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병을 고치러 갈 때도 막대한 보물과 왕의 친서를 들고 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Something)'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에게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합니다.

흙탕물에 들어가라는 명령은 장군의 계급장을 떼고 벌거벗은 나병 환자(Nothing)가 되라는 굴욕적인 요구였습니다.

그가 자존심을 꺾고 물속에 들어갔을 때, 그의 살은 어린아이처럼 깨끗해졌습니다.

그는 비로소 "이스라엘의 하느님 외에는 신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를 제로로 만드는 예언자를 만나야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예언자는 바로 '교회'입니다. 제가 지금 냉담자를 무작정 방문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낮아짐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모든 예절과 가르침, 고해성사와 전례는 우리 자신을 제로로 만듭니다.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제 탓이오"를 고백하게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치켜세우지만, 교회는 우리를 죄인이라 부르며 어둠 속에 앉힙니다. 

 

기분 나빠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메시아의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이 되었다고 착각하지 말고, 하루에도 백 번이라도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를 살려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존재가 됩시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2,1-14: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가 태어나셨다.” 

 

1. 성탄의 신비: “사람이 되셨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탄의 핵심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는 신비이다. 이는 인간 이성이 다 헤아릴 수 없는 구원 사건이며, 교부들은 이를 “놀라운 교환”(admirabile commercium)이라 불렀다. 성 아타나시오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De Incarnatione, 54,3)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은 단순히 인간의 연약함을 공유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당신의 신성에까지 끌어올리시려는 구원 의지의 표현이다. 

 

2. 빛과 해방으로 오신 아기

이사야 예언자는 “어둠 속에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이사 9,1)고 선포한다. 이 “큰 빛”은 바로 아기로 태어나신 구세주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아기의 낮아지신 속에서 참된 권능을 보았다. “그분은 위대하시며 동시에 작은 분이시다. 위대하심은 하느님으로서, 작으심은 우리를 위해 아기로 태어나셨기 때문이다.”(Sermo 184,2) 그분의 낮아지심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기 위한 하느님의 구원 방식이다. 

 

3. 역사 속에 오신 구세주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로마 황제의 호구 조사라는 역사적 배경과 연결한다. (2,1-5). 이는 구원이 허구나 신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임을 드러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분명히 가르친다.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은 인간의 손으로 일하고, 인간의 지성으로 생각하며, 인간의 뜻으로 행동하셨다. 참으로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다.”(사목 22항) 그리스도의 강생은 하느님이 인간 역사의 한복판에 들어오신 사건이며, 그로써 인간의 역사는 새로운 의미와 반향을 얻게 된다. 

 

4. 구유의 표징: 비천 속의 구원

천사는 목자들에게 구세주의 표징을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12절)라고 알려준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역설을 이렇게 해석한다. “보라, 구유에 누워 계시는 이는 천사를 지으신 분이시다. 아기의 모습으로 계시지만, 모든 것을 지탱하시는 분이시다.”(Homilia in Matthaeum, 2,2)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적 권세나 힘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드러났다. 이 비천함이야말로 하느님의 방식이다. 

 

5. 영광과 평화

천사들은 노래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14절).

여기서 영광과 평화는 서로 맞닿아 있다. 하느님께 드려지는 영광은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서로 화해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땅 위의 평화로 드러난다. 성 이레네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즉, 하느님께 영광이 드러나는 순간, 인간은 진정한 평화와 구원을 누리게 된다. 

 

6. 성탄 신비 오늘날의 의미

성 바오로 6세는 성탄의 신비를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감동적인 신비”라고 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 담긴 말씀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티토 2,11-12) 성탄은 단순히 과거 사건의 기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는 영광, 우리 사이에는 평화”를 실현하라는 초대이다. 

 

7. 맺음말

성탄의 신비는 결국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어 그분 자신을 내어주신 사건이다. 이 신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께 삶으로 영광을 드리고, 서로 사랑하며 화해함으로써 땅 위의 평화를 드러내는 것, 바로 이것이 성탄을 사는 길이다. 

 

 

 

김건태 신부님_평화의 나라

 

우리는 올 대림시기의 마지막 시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대림시기는 어떠한 시기였습니까? 주님 성탄에 임하는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잘 가꾸어지고 윤기가 흐르는, 그래서 온전히 자유로운 마음을 느끼십니까? 하느님의 말씀으로 조금이라도 변화되고, 그래서 행복을 맛보고 계십니까? 한 마디로, 세례성사 때 맺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새롭게 했던 시간들이었습니까?

 

즈카르야의 노래와 함께 진지하게 다시 정리해 보도록 합시다. 즈카르야와 함께, 그리고 구세주를 기다려온 모든 신앙인과 함께 진지하게 다시 읽어보도록 합시다.

 

오늘, 그 유명한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즈카르야는 하느님에게서, 그리고 그리스도 오심에서 겪었던 체험을 노래로 요약합니다.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별이 찾아오게 하실 하느님의 부드러운 자비의 발자취를 노래합니다.

 

이 자비의 업적은 우리에게까지 지속됩니다. 우리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자비와 그분의 용서로 변화되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시간들, 하느님의 이 업적들을 곰곰이 돌이켜보고 감사의 마음을 올리면 됩니다.

 

이 자비의 업적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나갈 것입니다.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예수님과 함께 이제는 우리가 그 완성을 위하여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협력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내일 또는 수일 내에 당장, 모든 것이 완전하게 구원되거나 해방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임을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씀 속에는 성취의 힘을 이미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를 뛰어넘어 부활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내실 분임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평화의 왕자로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정녕 평화의 나라를 세우시러 오시는 예수님의 성탄을 온 마음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경축하고 기뻐하며 우리는 그 평화의 나라가 꾸준히 세워지고 이어지도록 기도하고 희생하며 동참할 것을 다짐할 것입니다. 서로 서로에게 기쁜 성탄!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더욱 힘 있고 크게 울려 퍼지도록 굳게 다짐할 것입니다.

 

 

송영진 신부님_<‘나 자신’이 구유입니다. ‘내가’ 구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6-14)”

 

 

 

1) 아기를 구유에 뉘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외양간에서

 

태어나셨다는 뜻인데, 바로 뒤에 나오는 목자들이

 

그 외양간의 주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그 지역의 외양간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외양간이

 

아니라, 목자들의 숙소도 겸하는 동굴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 목자들은 방을 구하지 못한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기들의 숙소를 내주고, 들에서 야영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딱한 처지에 놓여 있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접대한 이들이 되었습니다(히브 13,2).

 

그 일에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라는 예수님 말씀이 바로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작은 이들’이 곧 예수님입니다.>

 

또 그 일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라는 요한 사도의 말도 연상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사랑은 하느님이십니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알려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의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바로 그 목자들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구유’는 인간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외양간에서 태어나셔서 구유에 누워

 

계셨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래, 누구나 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 라는 것을 생각하면,

 

낮은 사람들과 높은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바로 ‘가장 낮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외양간이고, 내가 바로 구유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예수님이

 

작은 이들을 구원하려고 오셨으니, 우리는 스스로 작아져야

 

한다.’ 같은 말을 흔히 하는데, 하느님 앞에서는 ‘큰 사람’과

 

‘높은 사람’이 없으니, 낮추거나 작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인간 세상의 높은 자리는,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자리입니다.

 

교황이든 추기경이든,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시골의 가난한 농사꾼이든 어린 아이든 간에,

 

하느님 앞에서는 똑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만일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속의 지위를 의식하면서,

 

“그래도 나는 그렇게 보잘것없는 존재는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은 교만이 될 뿐이고,

 

자신을 낮춘다고 해도 ‘거짓 겸손’과 ‘위선’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메시아 예수님을 밀어내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3)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는,

 

표현으로는 “여관에 ‘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인데,

 

뜻으로는 “베들레헴에서는 아무도

 

방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상황에서, “빈 방이 없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참 사랑’은

 

‘빈 방’을 내주는 일이 아니라, ‘나의 방’을 내주는 일입니다.

 

<내가 먼저 배불리 먹고 나서,

 

남은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먹으려고 했던 그 음식을,

 

먹지 않고 먼저 나누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요셉은 분명히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지만(4절),

 

다윗 집안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열두 지파 가운데에서 유다 지파가 가장 세력이

 

컸고, 유다 지파 가운데에서는 다윗 집안의 자손들의 수가

 

가장 많았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베들레헴은 호적 등록을

 

하러 온 다윗 집안의 자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라고 해도, 다윗 집안에서 존경받고 대우받는

 

어른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쉽게 방을 구했을 것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다윗 집안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면?

 

또는 사회적으로 아주 높은 지위에 있었다면?

 

그러면 사람들은 서로 자기 방을 요셉과 마리아에게

 

내주면서 자신의 친절과 호의를 과시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인간 세상에서 흔히 보는 것인데, 겉으로만

 

행하는 그런 친절과 호의는 사랑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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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병자를 위한 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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