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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3일 수원 교구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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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1,57)
'지금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오늘 복음(루카1,57-66)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습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합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루카1,20)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기쁜소식, 곧 엘리사벳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기쁜소식을 믿지 못해 줄곧 벙어리로 지냈던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자, 그의 입이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주님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탄생에 앞서 선택된 도구로서, 주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러 온 선구자입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1.23-24)
이렇게 선구자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으로, 그의 사명을 지니고 예수님에 앞서 태어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화답송 후렴)
주님의 성탄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속량(구원)이 가까웠습니다. 내일 밤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십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지금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생애 말년에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다시 시작합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 토빗10,7)
전삼용_당신은 당신에게 이름을 지어준 이의 본성을 받게 됩니다
찬미 예수님! 누군가의 이름을 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호칭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뿌리'와 '본성'을 지키는 투쟁입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이자 드라마인 『뿌리(Roots)』에 아주 처절한 장면이 나옵니다.
아프리카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던 주인공 쿤타 킨테는 노예상인에게 잡혀 미국으로 끌려옵니다. 백인 주인은 그에게 '토비'라는 노예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리고 채찍질을 하며 강요합니다. "네 이름은 뭐야?" "쿤타 킨테!" 채찍이 살점을 뜯어내도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아프리카 이름을 외칩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은 단어 몇 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 이름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이름을 버리는 순간 자신의 뿌리 (아프리카 전사)와 영혼을 잃고 백인의 소유물(노예 본성)이 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지키는 것은 나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지키는 싸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가 한 행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아기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습이자 혈통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즈카르야는 서판에 단호하게 씁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
즈카르야는 처음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아들을 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벙어리가 되어 침묵하는 동안 깨달았습니다. "이 아이는 내 핏줄을 이어받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어받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가 하느님이 지어주신 이름 '요한(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을 아들에게 부여하는 순간, 아기의 본성은 '인간 즈카르야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예언자'로 바뀌었습니다. 이름을 주는 대상이 자신의 '본성'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은 이 관계의 신비를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우리가 세례명을 받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요한아", "마리아야" 하고 불러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죄인이라는 몸짓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당신의 본성을 담은 이름을 주셨을 때, 우리는 그분에게로 가서 '꽃',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름을 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책임지고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기 자신과 동등한 본성이 되게 하겠다는 하느님의 맹세입니다.
하지만 형제자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름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그 이름값을 하며 사느냐'입니다. 개에게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고 해서 개가 사람이 됩니까? 우리는 개를 사람 대하듯 할 수 있지만, 개가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으면(짖거나 문다면) 결국 개일뿐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이름을 잊게 만들려고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셨습니까? 마녀 유바바는 온천장에서 일하게 된 주인공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아 버리고 '센'이라는 가명을 줍니다. 이름을 뺏긴다는 것은 곧 부모님과의 기억, 내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근원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주술이었습니다.
치히로는 자신의 본명을 잊어버릴 뻔하다가, 하쿠의 도움으로 진짜 이름을 기억해 냄으로써 마녀의 지배에서 벗어나 부모님을 구하고 현실로 돌아옵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곧 나의 근원인 부모님과 연결되는 생명줄임을 보여줍니다.
역사 속에 전해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대왕은 전쟁터에서 겁에 질려 도망치다 잡혀 온 병사를 만났습니다. 대왕이 이름을 묻자 병사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제 이름도 알렉산드로스입니다." 그러자 대왕은 병사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습니다.
"네 이름을 바꾸던지, 아니면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해라!" 대왕은 자신의 이름이 용기와 정복을 상징한다고 믿었습니다. 같은 이름을 쓴다면 그 본성도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우리 본성도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창세기 32장의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 즉 속이는 자였습니다. 그는 이름대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야보크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한 끝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뜻은 '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자'입니다.
이 거창한 이름을 받고 나서 야곱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는 절뚝거리며 형 에사우에게 나아가 일곱 번 절하고 화해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형을 두려워하여 뒤에 숨는 비겁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이긴 사람답게 당당하고 겸손하게 문제와 직면했습니다.
야곱은 새로운 이름을 받고 하느님을 이긴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형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겸손으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즈카르야는 아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줌으로써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녀에게 해야 할 가장 큰 일도 이것입니다. 세례명을 주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름만으로는 인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우리 세례명에 걸맞게 행동합시다. 프란치스코라면 가난을 사랑하고, 요셉이라면 의롭게 행동하며, 마리아라면 순종하십시오. 이름대로 행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본성에 이르게 됩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십니다. 거룩한 이름을 지닌 우리는, 하느님처럼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57-66: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1.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와 새 창조의 예표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았다(59절). 구약의 할례는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표징이었지만(창세 17,12), 교부들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보았다. 성 치프리아노는 말한다. “할례는 여드레째 되는 날에 이루어졌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여드레째 되는 날, 곧 주일에 부활하시어 새 창조의 시작이 되심을 예표한다.”(Epistula ad Fidum, 64) 따라서 요한의 할례는 단순한 유다적 의무가 아니라, 새로운 계약과 부활의 빛을 미리 드러내는 사건이다.
2. 이름의 신비: 요한(은총)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친족들의 전통을 거슬러 아이의 이름을 “요한”(하느님의 은총)이라 정한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사명과 정체성을 드러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의 이름은 그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은총을 뜻하며, 그가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을 예고한다.” (Homilia in Matthaeum, IV,6) 요한은 이름 자체로 이미 하느님 은총의 증언자이다.
3. 즈카르야의 입이 열리다. 즈카르야는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확정하는 순간,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한다. 믿지 못했던 사제가, 아들의 탄생으로 믿음을 회복한 것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묵상한다. “말씀을 의심하여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는, 은총의 이름을 고백함으로써 다시 말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닫으셨던 입술을 은총이 열어 주셨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II,34) 즉, 요한의 이름 안에 담긴 은총이 즈카르야의 혀를 풀고, 찬미로 이끌어 준 것이다.
4. 백성의 두려움과 경외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65절). 이는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경외심이다. 요한의 탄생이 이미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풀이한다. “요한의 기적적 탄생은 단순히 한 아이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실 분을 위한 길을 여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두려움에 휩싸인 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당신 일을 시작하셨음을 느꼈기 때문이다.”(Sermo 293,3)
5. 영성적 적용: 길을 준비하는 삶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그의 사명은 언제나 단순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실 분을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성탄을 준비하면서 요한처럼 살아야 한다. 할례가 새 계약을 예표하듯, 우리는 세례로써 새로운 창조 안에 산다. “요한”의 이름이 은총을 드러내듯, 우리의 존재도 은총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즈카르야가 입을 열어 하느님을 찬미했듯, 우리의 입술은 감사와 찬미로 열려야 한다. 이웃이 경외심을 가졌듯,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어야 한다. 베네딕토 16세는 말한다. “요한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오실 분을 위한 길을 닦는 삶이었다. 오늘의 신자들도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Jesus of Nazareth, vol.1)
요한의 탄생과 할례는 단순한 유다적 의례가 아니라 새 창조의 예고이며, 이름 속에 드러난 하느님 은총의 표징이다. 그의 탄생은 즈카르야의 찬미를 끌어내고, 백성 안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삶의 모범이 되고 있다.
김건태 신부님_하느님의 은총
오늘 복음은,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사랑, 그분의 구원 의지에 관한 예고 말씀을 접했던 또 다른 증인, 즈카르야를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불신으로 말미암아 말을 못하게 되었으나, 이제는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으로 새롭게 탄생합니다.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는 문제에서, 비록 세속의 전통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즈카르야는 이번에는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지시를 그대로 따릅니다: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루카 1,13). 즈카르야는 이제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았고, 요한이라는 이름의 의미대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 자식 없는 서러움에서 자식을 품게 된 은총, 불신에 대한 응벌로 말을 못하게 된 상태에서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송하게 된 은총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결국 이 일로 주변 사람들조차 두려움에 떨면서도 요한의 미래를 내다보는 은총,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필 것이라 확신하는 은총 속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 역시, 왜 그러한 일이 내게 닥치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신앙인으로 하느님의 뜻 앞에 서고,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거나, 내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임에도 피하지 못하고 결국 받아들여야 하는 사명 앞에 서게 되는 경우 등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경우가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보고, 그분의 은총을 체험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상상도 하지 못했던 힘과 용기가 나고, 잘 다스려 나갔던 시간들, 그토록 무겁게 다가왔던 짐이 그렇게 가볍게 지나갔던 시간들,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었을 고백하고 찬미의 소리를 높였던 시간들 말입니다. 내적인 평화가 나를 휩싸고, 주님과 깊고 넓은 친교를 나누었던 시간들 말입니다. 성탄대축일이 곧 다가옵니다.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이라도 담겨 있다면, 즈카르야를 다시 한번 보고 배우도록 합시다. 의심했지만, 그래서 말을 못하는 응벌의 시간을 살아야 했지만, 이 시간을 새로 태어남의 시간으로 극복하여, 끝내 하느님의 은총 속에 머물게 된 즈카르야는 우리의 새로남, 우리를 성탄의 길로 인도하는 탁월한 증인이요 안내자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당신 은총의 수혜자가 될 사람들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께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응답하며, 적극적으로 나서는 은총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병자를 위한 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송영진 신부님_<인생의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됩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57-66).”
1)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메시아 강생’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 되고(루카 1,76), 성탄절을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대림 시기가 곧 끝난다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틀 뒤가 성탄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지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인생의 대림 시기’는 계속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이천 년 전에 ‘이미 오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시간입니다.
‘재림’은 떠나셨던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일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시는 일입니다.
<매일미사 책에서는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오신다.’고
표현했는데, 그렇게 표현하면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떠나신다.’도 되기 때문에, 옳은 표현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늘, 항상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2)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메시아 강생’과 ‘요한의 사명’을
믿게 된 것은 ‘성령의 인도’ 덕분이지만(루카 1,41.67),
마리아의 증언도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루카 1,39-55).
그래서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아기의 이름을 지을 때 엘리사벳이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엘리사벳에게
전해 주었고, 엘리사벳이 그 말을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즈카르야가 ‘아기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쓴 것은,
자신이 천사의 말을 믿게 되었음을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해서 말을 못하게 되었던 그가 다시
말을 하게 된 것은, ‘기쁜 소식’을 선포할 자격을 얻었음을
나타내고, 또 사제의 자격도 회복했음을 나타냅니다.
<62절의 ‘손짓으로 물었다.’ 라는 말은,
즈카르야가 ‘듣는 능력’도 잃었음을 나타냅니다.
그에게 주어진 표징이 왜,
‘말을 못하다가 다시 하게 되는 것’으로 주어졌을까?
그것은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회개를 선포하고 메시아를 증언하는 일인데,
그 일은 일차적으로 ‘말’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64절의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라는 말은, 68절-79절에
있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가리킬 것입니다.
3)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라는 말과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라는 말은, 이웃과 친척들이
아직 ‘메시아 강생 소식’을 모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그 소식을 들었고, 믿었다면, ‘모든 사람’에게
주님께서 큰 자비를 베푸셨음을 기뻐했을 것이고, 또 주님의
손길이 ‘모든 사람’을 보살피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65절의 ‘두려움에 휩싸였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을 느끼고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4) ‘계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시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뜻과 계획을 믿고, ‘삶으로’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다시 전해 주는 생활입니다.
즈카르야가 처음부터 천사의 말을 믿었다면,
곧바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는 ‘즈카르야의 노래’를 아기가 태어난 후가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 불렀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경우를 보면, 천사의 말을 바로 믿었고,
그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바로 알렸습니다.
<엘리사벳에게 가기 전에 먼저 요셉에게 알렸을 것이고,
가족에게도 알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을 통해서 나중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노래’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가 아니라
태어나시기 전에 부른 노래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러 가지 계시를 받게 됩니다.
<전체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계시일 수도 있고,
그냥 사적이고 작은 일에 관한 계시일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듣는 말씀 한 마디, 한 구절이, 또는 어떤 체험들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려 주시는 계시입니다.
신앙인은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고, 각자 자신이
받은 계시를 자신의 삶으로 실행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 계시를 전하고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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