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04. 기다림 속에서 완성되는 선물 / 임신 29–40주 / 대림 4주)
이미 관계 안에 있는 존재
#머무름 #존재의존엄 #생명존중 #기다림
루카 1장 46–56절의 마니피캇은 대림시기의 정점에서 울려 퍼지는 영혼의 찬가다.
이 노래는 단순한 감사의 표현을 넘어, 하느님께서 어디에 머무시기를 선택하셨는가를 드러낸다.
마니피캇은 최초의 감실인 동정녀 마리아의 입술을 통해 세상에 울려 퍼진 첫 신앙 고백이며 첫 복음 선포다. 마리아의 자궁은 신성과 인성이 만나는 첫 번째 성전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실존의 가장 연약한 순간, 아직 말할 수 없고,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는 태아의 상태로 인간성을 취하셨다. 이 육화의 신비는 강함이 아니라 연약함을 거처로 삼으신 하느님의 선택을 보여준다.
마니피캇은 특별한 만남의 자리에서 불려졌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은 임신 6개월이었고 마리아는 막 임신한 상태였다.
마리아의 인사를 듣자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이가 기쁨에 차서 뛰놀았다. 그리고 그 직후, 마리아의 노래가 시작된다.
이 장면은 단지 두 여인의 만남이 아니다. 두 태아의 만남이기도 했다.
마리아의 태중에 있던 예수님과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요한은 서로를 인식하고 반응한다.
성경은 이 장면을 통해 태아를 단순한 생물학적 단계로 보지 않는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관계 안에 있는 존재, 은총을 주고받는 살아 있는 인격으로 증언한다.
현대 의학은 후기 임신기의 태아가 어머니의 목소리를 구별하고, 외부의 소리에 반응하며, 안정과 불안을 감지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성경이 증언한 태아의 인격성은 현대 과학을 통해 다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임신 29주에서 40주에 이르는 시기는 생명이 완성을 향해 깊어지는 시간이다. 태아는 더 빨리 나아가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증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머무른다.
이 머무름 속에서 감각은 정교해지고, 호흡은 준비되며, 세상과 만날 준비가 이루어진다.
마니피캇은 세상의 질서를 뒤집는 노래다.
교만한 이들, 권세 있는 이들, 부유한 이들이 아니라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가 시작됨을 선포한다.
하느님은 자신을 지킬 힘도, 자신을 주장할 말도 없는
가장 무력한 태아의 형상으로 세상에 오셨다.
29주 이상의 태아는 이미 살아 있으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바로 이 약함 속에서 하느님의 선택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존엄은 능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율성이나 생산성에서도 오지 않는다.
존엄은 하느님께서 그 생명을 바라보신 사실에서 시작된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마리아는 약 40주 동안 자신의 몸 안에 하느님을 품고 기다렸다.
이 기다림은 수동적인 대기가 아니었다. 마리아의 몸은 성령의 성전이 되어 생명을 보호하고, 자라도록 허락하는 능동적인 협력의 자리가 되었다.
임신 29주에서 40주까지의 시간 역시 그렇다.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이 세상으로 나오기 전, 가장 깊이 보호받아야 할 시간이다.
나는 대림시기에 이 태아의 여정을 함께 묵상하며
모든 생명이 지닌 신성함을 다시 마음에 새긴다.
대림의 촛불처럼,
태아의 생명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나는 희망의 표징이다.
비천한 이의 기도
비천한 종을 돌아보시는 주님,
당신께서는 가장 작은 생명 안에 머무십니다.
어머니 태중의 아기들을 축복하시고,
모든 생명이 존중받는 세상을 이루게 하소서.
마리아처럼 생명을 품고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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