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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 수원교구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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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11,3)
'자선과 자비 자체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11,2-11)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즘 때가 때이다 보니 주님에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을 자주 듣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는 사명에 충실했던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 주는 예언자였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11,11)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1,20.26-27)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고, 또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제42회 자선주일'입니다. '자선의 본질'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사랑'입니다. 자선이 삶 자체였던 토빗은 말합니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12,8) '자선은 사랑이고 나눔이고, 희생입니다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셨습니다. '모두의 구원을 위한 자선 그 자체'이셨습니다. 그 표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자선'이 되어야 합니다. '충실하고 겸손한 자선'이 되어야 합니다. 자선은 단순히 물질적인 나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웃이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에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도 큰 자선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12,7)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예수님을 닮은 자선이 됩시다! 예수님을 닮은 자비가 됩시다!
(~느헤7,45)
전삼용 신부님_행복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276대의 자동차와 감사 일기
2004년 9월 13일, '오프라 윈프리 쇼'의 방청석에는 276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차가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살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쇼의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가 외쳤습니다.
"여러분 의자 밑을 보세요! 상자가 있을 겁니다. 그 상자를 열어보세요. 열쇠가 들어 있는 사람이 바로 새 차의 주인공입니다!" 사람들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방청석에 앉은 모든 사람의 상자에 차 열쇠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스튜디오는 비명과 환호성으로 가득 찼고, 오프라 윈프리는 눈물을 흘리며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모두에게 차를 드립니다! (Everybody gets a car!)" 12월11일 사람들은 그녀를 '성공한 여자', '기부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이 처음부터 이토록 빛나고 행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사생아로 태어나 지독한 가난과 학대 속에 자랐고, 14세에 미혼모가 되어 아기를 잃었으며, 마약에 손을 대어 감옥에 갈 뻔했습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지옥이었고, 눈을 뜨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녀를 지옥에서 건져 올린 것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감사 일기'라는 작은 습관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부터인가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중 감사한 것 5가지를 찾아 적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거뜬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유난히 눈부시고 파란 하늘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점심때 맛있는 스파게티를 먹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하루 종일 고통스러워도, 잠들기 직전 5분 동안만큼은 행복하게 하루를 마감하기로 '착한 뜻'을 세웠습니다. 그 짧은 5분의 평화를 얻기 위해, 그녀는 낮 동안의 모욕을 참아내고, 유혹을 이겨내고, 긍정적인 것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 '착한 뜻'이 그녀를 마약과 절망의 늪에서 건져 올려, 세상을 돕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만들었습니다.
순간의 쾌락 vs 마지막의 평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루 중 언제 가장 기분이 좋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을 언제로 삼느냐에 따라 행복을 찾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마지막 순간을 위해 찾는 것이 '지혜'이고,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찾는 행복의 방법이 '지식'입니다.
지혜는 지금의 광야와 미래의 부활을 말하지만, 지식은 지금의 즐거움과 이후의 공허함이나 죄책감을 낳습니다. 따라서 어느 순간의 행복에 주안점을 두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행복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구약 성경의 에사우를 보십시오. 사냥에서 돌아온 에사우의 코끝을 찌른 것은 붉은 팥죽의 냄새였습니다. 배고픔에 눈이 먼 그의 '지식'은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지금 당장 배를 채우는 게 행복이야. 미래의 축복 따위는 지금의 허기를 달래주지 않아." 그는 동생 야곱에게 외칩니다. "형, 나 배고파 죽겠어. 그 맏아들 권리가 지금 당장 무슨 소용이야?" 결국 그는 찰나의 포만감을 위해 가문의 영원한 축복인 장자권을 팔아넘깁니다 그가 팥죽 그릇을 비우고 난 뒤 남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배부름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평생을 두고 흘려야 할 통곡의 눈물만이 남았습니다. 지금의 만족이 미래의 축복을 삼켜버린 비극입니다.
손끝의 말초적인 쾌락에 신경을 곤두세우면, 정작 생명의 중심인 심장은 무감각해지고 평화를 잃게 됩니다. 대문호 헤밍웨이를 보십시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글을 쓴다"는 철칙을 지키며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침형 인간이었고 성공한 작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삶의 끝, 즉 저녁의 평화를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명예와 돈은 그에게 내면의 평화를 주지 못했고, 결국 그는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세기의 연인 마릴린 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화려한 스타가 되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전 세계가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잠들기 전의 평화를 알지 못했습니다. 약물 없이는 잠들지 못했고, 공허함 속에 36세의 나이에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들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을까요? 과정의 행복과 성공은 추구하였지만, 결말의 기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처럼 아침에는 바위를 밀어 올리려 애쓰지만, 저녁에는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보며 절망하는 삶이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감사일기라기보다는, 그 감사를 잠들기 전에 매일 쓰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지혜를 찾는 자는 광야로 나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군중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마태 11,7-8). 사람들이 안락한 도시를 떠나 거친 광야로 나간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그들은 고생을 사서 하며 광야로 나갔을까요? 그들 안에는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이 있다"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당신을 의심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당신을 만난 이들이 ‘마지막’에 치유되고 되살아난다는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상은 끝에 주어집니다. 메시아를 만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끝을 중요시 여기는 이들만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손끝이 아닌 심장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는 손끝의 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라, 심장의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손끝은 닿는 순간 짜릿하지만 금방 사라집니다. 그러나 심장의 평화는 영혼 깊숙이 남아 우리를 지탱합니다. 그것은 바로 양심이 주는 평화입니다. 하루를 죄짓지 않고 사랑하며 잘 살았을 때, 잠자리에 누워 느끼는 "아, 다 이루었다" 하는 그 뿌듯함, 그것이 바로 심장의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삶도 그러했습니다. 그분은 평생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럽고 험난한 광야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다 이루었다."(요한 19,30). 그 짧은 한마디 속에 담긴 평화와 안도감, 그리고 아버지께 대한 뿌듯함. 예수님은 바로 이 마지막 순간의 승리를 위해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이것이 지혜를 가진 이의 삶입니다.
마지막 순간을 위해 사는 사람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은 아침이 아니라 저녁에 결정됩니다. 로마의 한 야심만만한 법대생이 필립보 네리 신부님을 찾아와 들뜬 목소리로 자랑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이제 법학 박사가 될 겁니다!" 신부님은 웃으며 물으셨습니다.
축하하네. 그다음은? (E poi?)" "그다음엔 훌륭한 변호사가 되어 명성을 떨쳐야죠." "좋지. 그다음은?" "돈을 많이 벌어 편안한 노후를 즐길 겁니다."
그렇군. 그다음은?" 청년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습니다. "뭐... 언젠가는 죽겠지요."
신부님은 청년의 눈을 꿰뚫어 보며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청년은 그 마지막 질문 앞에서 벼락을 맞은 듯 멈춰 섰습니다. 지금 당장의 성공 사다리 끝에 무엇이 있는지, 심판과 영원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그는 '지식'의 길을 버리고 '지혜'의 길을 선택하여 훗날 사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은 언제 기분이 좋기를 원하십니까?
순간의 쾌락을 좇다가 밤마다 불안과 허무함에 시달리시겠습니까, 아니면 낮 동안 땀 흘려 사랑하고 광야의 고통을 견딘 후, 밤에는 "다 이루었다"는 평화 속에 잠드시겠습니까? 잠들기 전 5분, 하느님과 단둘이 만나는 그 시간을 여러분 인생의 클라이맥스로 만드십시오. 그 5분을 위해 하루를 산다면, 여러분은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광야로 나가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세례자 요한을 만나게 될 것이며, 마침내 오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11,2-11: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1. “기뻐하여라”: 하느님이 가까이 오신다. 대림 제3주일은 “기뻐하라” 주일이라 불린다. 전례의 색도 자주색 대신 장밋빛으로 바뀐다. 그 이유는, 기다림의 긴장 속에서도 이미 임하신 주님 때문에 교회가 기쁨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구원이 가까이 있음에서 오는 기쁨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한다.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6) 구원은 인간의 전 존재, 즉 육체와 영혼,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피조물 전체를 새롭게 하는 총체적 치유이다. 성 이레네오는 구원의 이 온전함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살아나기 위함이다.”(Adversus Haereses III, 20,2) 따라서 대림의 기쁨은 단순한 감정적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변형의 기쁨, 곧 구원의 기쁨이다.
2. 세례자 요한의 질문: 하느님의 방식에 대한 혼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예수께 제자들을 보내어 묻는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선생님이십니까?”(3절) 요한은 종말의 메시아를 “심판자”, “정의의 불”로 기대했다(마태 3,12 참조).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병자를 고치고, 가난한 이를 위로하며, 용서와 자비를 선포하셨다. 요한이 혼란스러워했던 이유는, 하느님의 방식이 인간의 기대와 달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온유하시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5절) 이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이사 35,5-6; 61,1)을 그대로 성취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심판하시는 메시아”가 아니라, “자비로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해석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권능은 파괴가 아니라 치유에 있다. 그분은 죄인을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러 오셨다.”(In Matthaeum homiliae, 36,2) 하느님의 권능은 온유함 속에서 드러나는 능력이며, 그분의 정의는 자비로 완성되는 정의이다.
3. 요한의 위대함: 기다림의 신앙 요한은 자신의 시대에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7절)가 아니며, 세속적 안락이나 권력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위대함은 바로 진리 앞에서의 굳셈과 회개의 영성에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큰 이는 없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 크다.”(11절) 이는 요한이 새로운 계약이 시작되기 직전의 사람임을 뜻한다. 요한은 메시아를 증언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이도 요한보다 크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된 이들의 새로운 존엄을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요한은 율법과 은총 사이의 다리이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이자 신약의 첫 목소리이다.”(Sermo 293,3) 요한의 위대함은 그의 행위보다, 그가 기다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믿음의 인내에 있다.
4. 인내의 신앙: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기쁨 야고보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이 가까우니 인내하십시오. 농부가 땅의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야고 5,7)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이 조급하게 당겨올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분의 구원은 하느님의 때(kairos)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완성된다. 그 기다림 안에서 신앙의 인내가 기쁨으로 변하는 것, 이것이 바로 대림 제3주일의 핵심이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이다. 기다림 그 자체가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Homiliae in Evangelia, 1,5) 따라서 참된 기쁨은 고난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때를 믿고 기다릴 수 있는 평화에서 오는 것이다.
5. 기쁨의 근원: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분의 은총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 “주님 안에서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립 4,4) 이 기쁨은 세상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무는 데서 오는 존재의 기쁨이다. 이 기쁨은 눈물과 고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루카 10,9) 선포하셨을 때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완전한 기쁨’을 이렇게 설명했다. “형제여, 우리가 어떤 모욕과 고난을 받아도, 그 가운데 주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기쁨이다.”(Fioretti, cap. 8) 대림 제3주일의 “기쁨”은 바로 이 감사로서의 기쁨, 하느님이 가까이 계심을 아는 신앙의 기쁨이다.
✠ 맺음말 요한의 의문, 예수의 대답, 그리고 야고보의 인내는 모두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의 신앙”을 가르쳐 준다. 기쁨은 조급한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이 가까이 있음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것이다. “행복하여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6절) 대림 제3주일의 초대는 바로 이것이다. 의심 대신 신뢰로, 두려움 대신 기쁨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다.
김건태 신부님_하느님 나라의 첫째 자리 [말씀] ■ 제1독서(이사 35,1-6ㄴ.10) 아시리아 제국이 북 이스라엘 왕국의 주민들을 사로잡아 유배지로 압송해 가고 남 유다 왕국을 황폐화하려던 때에 예언자 이사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버림받고 상처받고 짓눌린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구원하러 오시는 하느님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며, 이 무리가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탈출 사건을 새롭게 하고 활기찬 생명력을 되찾아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갈 것입니다. ■ 제2독서(야고 5,7-10) 자기의 서간을 통하여 야고보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작은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사람들 못지않은 중요한 존재들임을 역설합니다. 그는 땅의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들처럼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질 것”을 촉구합니다. 새로운 세계는 분명 다가올 것이며, 이날 의롭고 올바른 심판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복음(마태 11,2-11) 임박한 죽음을 의식한 상태에서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은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자기가 제대로 알아보았다고 믿었던 메시아가 맞는 존재인가? 자기가 혹시 잘못 알아보았던 것은 아닌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전해 들은 이와 같은 질문 앞에서 주님은 참된 왕국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를 안심시키십니다. 마음을 열어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은, 이토록 위대한 예언자였던 요한조차 이르지 못했던 충만함을 누리고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새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첫째 자리는 흔히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세력을 떨치고 있는 사람들,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차지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들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실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힘의 논리를 무조건 수용하고 순응해야 하는 약자들로 취급되기 일쑤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나 이와 같은 반공동체적 의식과 현실은 당연시됐으며, 불행하게도 우리 한 민족공동체는 물론 때로는 교회공동체 안에서조차 이런 의식이 짙게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까 걱정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 자리는 하느님과 이웃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 사람들의 차지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은 겸손한 사람들로서 어떠한 인간적 고통이라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힘들 때일수록 주님께 더욱 달려드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탄 축일은 분명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의 메시지를 전해줄 것이나, 이 메시지는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피하거나 간과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극복해 나가려 애쓰는 사람들에게나 제대로 전달되고 수용될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 열려 있는 마음이 절실한 때입니다. 그래야 오시는 주님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또한 ‘자선 주일’이기도 합니다. 겸손한 마음, 열린 마음으로 우리보다 훨씬 못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힘없고 가난한 모습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준비를 하는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메시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한이 아니라.>
“그런데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2-11)”
1)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고 ‘증언’했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34).”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이 ‘증언’과 마태오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모순됩니다.
학자들은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1)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의심했다.
그래서 ‘직접 보고 믿으라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다.
(2) 요한은 메시아 예수님을 심판하려고 오신 분으로
생각했는데(마태 3,12), 예수님께서 심판은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는 일만 하시니까 당황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기는 어렵고,
실제로는 두 가지 상황이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게 의심을 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2) 4절-5절의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요한 10,37-38).”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인간 구원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일, 즉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 즉 ‘메시아’입니다.
3)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고,
그를 변호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요한이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위대한) 인물인 것은,
단순히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만 한 예언자가 아니라,
‘메시아의 일’을 미리 준비한 선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의 구원사업’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라는 뜻인데,
여기서 ‘사람들’을 ‘구약시대 사람들’로 좁혀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라는 말씀은, 신약시대, 또는 메시아 시대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메시아 시대가 위대한 것은, 사람들의 구원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내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된
‘지금’이라는 시간이 가장 위대한 시간입니다.
물론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4)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라고 가리키는데, 보라는
예수님은 안 보고 세례자 요한만 바라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말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5)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에게 하신 ‘첫 질문’은
“무엇을 찾느냐?”였습니다(요한 1,38).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 라는 믿음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찾는가?”입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목적지를 잃게 되고, 목적지를 잃으면 신앙생활은 무의미하고 허무한 ‘방랑’이 되어버립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대림 제3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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