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7일 (수)
(자) 12월 17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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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신부님_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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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2-14 ㅣ No.186834

* 오늘의 말씀(12/14) : 대림 제3주일

* 제1독서 : 이사 35, 1-6.ㄴ. 10

* 제2독서 : 야고 5, 7-10

* 복음 : 마태 11, 2-11

2 그런데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5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7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9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 <오늘의 강론>

그리움이 길이 된다(박노해)

나는 기다리는 사람 / 그리움을 좋아한다. //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 너에게 사무치는 걸 좋아한다. //

기다림이 지켜간다. / 그리움이 걸어간다. //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 그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 눈물 나는 내 사랑은 /

그리움이 가득하여 /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

기다림이 걸어간다. / 그리움이 길이 된다. //

대림이 깊어가고 기다림과 그리움이 깊어가면서 빛이 다가옵니다. 해가 뜨기 전 먼동이 터오듯, 참 빛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까워지면서 세상에 희망의 동이 터옵니다. 이토록, 보랏빛 동녘 하늘 타오르는 오늘은 “기쁨주일”입니다. 이 기쁨을 오늘 <입당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기쁨을 선포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이사 35,1-2)

오늘 우리는 이 기쁨주일에 핑크빛 옷을 입고서 설레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으로 벅차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광야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직도 ‘감옥’이라는 광야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광야는 목을 내밀고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입니다. 기다림만으로 온전히 꽉 찬 공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불의를 징벌하고 정의를 세우는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요한은 자신이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의혹이 생겼을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29 참조)라고 증언하기도 했지만,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을 통하여, 신앙고백에 이르러야 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이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활동 모습이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선언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마태 11,4) 이르시면서, ‘보고 들었던’ 내용을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표현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보여주셨습니다. 실로, 인간 삶의 길과 하느님 생명의 길은 사뭇 다릅니다. 인간 삶의 길은 먼저 살고 나중에 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생명의 길은 먼저 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항상 살기 위해서 애를 쓰며 모든 힘을 다 쏟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힘을 다 탕진하고, 애를 쓸 힘이 더 이상 없으면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먼저 죽는 일입니다. 그러면 살게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은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 생명의 길을 따라 자신을 버리면, 진정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선언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이 “오실 분”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라면, ‘뒷부분’은 ‘먼저 오게 될 사자’인 세례자 요한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러나 이 증언은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증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임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마태 11,10)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길”을 내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당신의 길을 마련하시고자 하십니다. 당신의 길이 우리 마음 안에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대림 시기는 다름 아닌 바로 이 ‘길을 닦는 일’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침없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의 길을 곧게 하는 일입니다. 아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주님!

당신께서는 말씀의 실행을 통해 “오실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깨달아 알도록 하셨듯이

제가 하는 일을 보고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하소서.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말씀의 실행을 통해 제가 누구인지를 증언하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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