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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수원 교구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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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 특별히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와 같은 지도층은, 구약시대의 전승에 따라,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파견하시기에 앞서 엘리야를 먼저 보내실 것이라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 여겨지는 말라키는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하고 전언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유형의 예언을 근거로,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에 대해 자주 이의를 제기하곤 했습니다. 엘리야가 먼저 파견되었어야 하는데, 그런 적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돌려놓았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은, 모든 예언자에게 그렇게 했듯이, 그를 제멋대로 대했다고 질타하십니다. 나아가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고 이르시자, 비로소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닫습니다.”
메시아를 준비하기 위해 하느님이 먼저 보내신 엘리야, 곧 세례자 요한은, 복음서에 의하면, “길을 곧게 내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낮게 할” 사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선포할 사람,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며, 알곡을 하느님의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메시아를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존재입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전승 속의 엘리야가 수행했어야 했던 사명을 그대로 완수한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이 시대의 표징을 알아볼 능력이 없다면, 당신이 메시아임을 알아볼 능력과 자격이 없음을 천명하시는 듯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을 것이며, 그것도 바로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이 알아보지 않기를 고집한다면, 새 율법 학자들, 곧 제자들이 예수님의 메시지를 파악하고, 십자가 예고를 해독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에 앞서 엘리야를 기다려 왔지만, 구약시대의 예언자 엘리야와 똑같은 인물, 외적으로 똑같은 인물을 품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왜 엘리야를 파견하실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메시아를 준비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임을 간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온 새로운 엘리야로서의 요한 세례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스스로 요한 세례자가 되어, 나와 하느님,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시간, 기도가 필요하다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 실천이 필요하다면 더욱 정성을 기울이며, 잘못이 있다면 곧은 회개의 길을 찾는 가운데,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정성껏 맞이해 나가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 사건 직후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그들은 메시아 도래 전에 엘리야가 다시 와야 한다는 말라키 예언(말라 3,23-24)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키시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말씀하신다. 이는 곧 하느님의 예언은 이미 성취되었으나,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했다는 경고이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길을 예비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갖추고 왔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멸시하였으니, 이는 그리스도 자신을 거부할 징표였다.”(In Matthaeum Homiliae 57,1) 세례자 요한을 거부한 이스라엘은 결국 메시아를 거부할 준비를 스스로 한 것이었다. 성 예로니모는 “요한은 외모로는 엘리야가 아니지만, 엘리야의 정신과 힘으로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Commentarium in Matthaeum 2,17) 교부들은 요한을 ‘영적인 엘리야’로 보았으며, 그의 사명은 메시아의 길을 여는 것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은 오시기 전에 당신의 길을 준비하도록 엘리야를 보내셨다. 그러나 그 길을 준비하는 사람은 박해를 받았고, 그 길을 걷는 분 역시 박해받으셨다.”(Sermo 293,3) 엘리야적 사명은 언제나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의 계획을 드러내는 길이었다.
교회는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이해한다(교리서 719항). 그는 엘리야처럼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하며 메시아의 길을 닦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배척했고, 결국 주님 자신도 같은 운명을 겪으셨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세속적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구원임을 보여준다.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깨어있음과 증언의 소명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께 충실한 삶을 살았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티토 2,11-13), 우리는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야 하며, 복된 희망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가 지금 세상 안에서 ‘작은 엘리야’가 되어,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다면, 그분의 다시 오심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이 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오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주님께서도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맞아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받았다(요한 1,12). 우리도 엘리야와 요한처럼, 세상의 무관심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작은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대림의 이 시기는 바로 그분을 알아보고 영접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은총의 때이다.
전삼용 신부님_마태오 17,10-13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이해 못 할 때; 부모도 자녀에게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변모하시고 내려오는 중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면 당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율법 학자(모세) – 엘리야 – 메시아’에 관한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타볼산에서 만난 모세이고 모세는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다음 엘리야가 필요하고 마침내 이 두 단계를 거치면 메시아가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종교 안에서도 하나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약간 교리를 바꾸어 돈벌이하는 사이비들을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은 모세-엘리야-메시아의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 종교 안에 스며들어있는 사이비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어렸을 때 받은 상처에 대한 탓을 너무 부모에게만 돌린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부모로서 키우면서 딸에게 부족한 사랑을 준 것은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힘든 이유를 지나치게 부모 탓만 하니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영성 심리 학회에서 교육도 받고 피정도 하고 상담을 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당연히 지금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모든 심리적 문제는 사랑을 부족하게 받아서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방법에 머물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는 사랑하지 못하는 탓을 남에게 돌리게 하지 않습니다. 자아와 삼구에 돌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방법을 따라야 하며 부모에게 용서를 받게 하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역할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모세입니다. 그러나 이것에만 머물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이제 초점을 나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를 청해서 그 상처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 상처 받은 자아를 죽이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엘리야의 역할입니다.
왜 이미 성인이 되었으면서도 그래도 할 만큼 한 부모 탓을 하게 만듭니까? 부모가 부족했어도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완벽합니까? 엘리야는 우리 시선을 자아로 이끌고 그 자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엘리야는 가르멜산에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이끄는 예언자들의 목을 쳤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시합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우리 문제가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음을 명확히 일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들은 무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자아와 삼구를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자신들이 하는 기도회나 상담, 피정,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어떤 방법들을 통해서 어렸을 때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피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치장합니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것을 즐깁니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고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알리는 엘리야의 역할을 본인들이 하려고 하는 이들이 사이비입니다. 자신들의 역할을 강화하며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대부분의 사이비는 이렇게 엘이야가 와야만 하는 필요성을 무시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이비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말하는 사이비들을 조심하십시오. 엘리야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표지판과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은 자신 안에 사람들을 잡아놓지 않습니다. 어린양께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께 떠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는 자기가 커지며 예수님의 역할을 줄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합니다.
영화 ‘새크라멘트’(2014)는 마약에 빠진 누나가 어느 종교단체에 들어가는데 친동생에게 이곳이 너무 좋다고 한번 오라고 초대장이 와서 친구 두 명과 함께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이는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곳의 교주 짐 존스는 900여 명의 신도에게 에덴동산과 같은 그곳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런데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동생과 기자들이 떠나는 날이 되자 그곳에서 소란이 일어납니다. 행복하기만 하다고 말하던 그들이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청하는 이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자 짐 존스는 무장한 부하들에게 그곳을 떠나려는 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고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당연시되자 남아있는 이들 또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수백 명의 아이와 함께 900여 명이 자살하거나 피살된 이 사건은 911 테러 이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왜 9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 것일까요? 그들이 엘리야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도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마치 자기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면 그것은 사이비입니다.
엄마도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데 자녀의 종교적 자유를 주지 않는 부모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자녀와 부모는 하느님 앞에서 같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선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여기서까지 부모가 자녀들에게 종교를 강요한다면 부모가 사이비 교주가 됩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데 본인도 구원에 들지 못했으면서 본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니?”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어쩔 뻔했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본인이 예수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항상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게 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커지면 그것이 곧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에 빠지지 않도록 ‘율법 – 엘리야 – 메시아의 고리’를 명확히 이해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모두 엘리야고 요한입니다. 우리는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 있으면서 나의 역할을 줄여가지 않는 사람은 사이비입니다.
양승국 신부님_엘리야 예언자의 역할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 못지않게 역사에 길이 족적을 남긴 대 예언자가 있었으니,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그는 BC 9세기경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는 ‘나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입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성격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불처럼 일어섰고,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늘을 닫아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 보냈습니다. (집회서 48장 1~3절)
엘리야 예언자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서 설설 기던 절대 권력자 임금 앞에서도, 난다긴다 하던 고관대작들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전했고, 철퇴 같은 불호령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계약을 재건했습니다. 또한 그는 “율법에 대한 불타는 열성 덕분에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1 마카베오 2장 58절)
“그는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서 48장 9절)
엘리야 예언자는 예전에 모세가 하느님의 뒷모습을 보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하느님을 목격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는 모세와 같은 역할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북왕국의 아합 임금은 페니키아 공주이자 시돈 임금의 딸 이제벨과 정략 결혼을 하고 이제벨의 종교인 가나안의 종교를 장려했습니다. 이제벨은 상아궁에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계획들만을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제벨은 바알 신전에서 바알 예언자들 수백 명을 먹여 살리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세적 번영과 풍요를 보증하는 가나안 신들과 정의와 검소한 생활을 요구하는 하느님 사이에서 가나안 신들 쪽에 훨씬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천둥처럼, 벼락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시골 출신의 기인(奇人), 길르앗의 엘리야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 하느님을 저버리고 가나안의 바알을 섬기는 모습을 목격하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와 격정을 느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 산에서 하느님의 신비로운 도움에 힘입어 우상 숭배에 푹 빠져 살아가는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권리가 침해받을 때마다 불꽃처럼 일어섰습니다. 날카로운 비난을 퍼부으며 강력히 도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 예언자는 언제나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 편에 서서 사회 정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는 비옥한 땅을 강탈하기 위해 나봇을 살해한 아합 임금을 통렬히 비난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역할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부여받은 사명을 엘리야의 사명과 연관시킵니다. 나인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기적은 사렙타에서 일어난 엘리야의 기적을 상기시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에게 보복의 불을 하늘로부터 내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불타게 하는 성령의 새로운 불을 가져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또 다른 엘리야 예언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불꽃같이 자신의 삶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멋진 예언자, 거짓과 불의 앞에 참지 못하고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는 예언자,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사람 앞이라 할지라도 부패한 권력 앞에서는 할 말 제대로 하는 예언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이병우 신부님_"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17,12)
'영이 맑은 그리스도인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17,10-13)은 '엘리야의 재림인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17,11-12)
당시 율법 학자들은 '말라기 3장 1절과 23절의 말씀'에 근거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는 사상에 갇혀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물음은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가 메시아인가?"였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그런 사고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엘리야의 모습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앞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던 것입니다.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왕국 시대에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고, 바알과 아세라 이방신들을 몰아낸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에녹(창세5,24 참조)과 함께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예언자입니다.(2열왕2,11 참조)
오늘은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많은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루치아(Lucia)'는 '빛' 또는 '광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이 맑으면 빛납니다. 영이 맑으면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고, 더 나아가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영이 맑은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 안에 머물고, 그래서 제대로 보고 바르게 행동하는 참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느헤5,19)
송영진 신부님_<믿는다면 회개할 것이고, 회개한다면 믿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7,10-13).”
1)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높은 산’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고,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마태 17,1-9).
그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는데, 백 퍼센트 확신은 아니었고,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메시아보다 먼저 온다는 엘리야는
누구인가? 엘리야가 정말 왔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메시아보다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예언은
말라키서 3장 23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던(믿기를 거부했던)
율법학자들은 그 예언을 근거로 해서, “엘리야가 아직
안 왔으니,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표현만 보면
율법학자들의 주장에 대한 질문으로 보이지만,
뜻으로는 말라키서의 예언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다.” 라고 대답하십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라는 말씀은, 박해받고 순교한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 중에는, “세례자 요한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엘리야가 아니다.” 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한이 정말로 엘리야라면 사람들을 모두 회개시켰을
것이고, 그러면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요한은 회개를 선포한 것만으로도
임무를 완수했다. 그의 순교는 임무 실패가 아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요한의 순교는 회개하기를 거부한 자들의 범죄일 뿐입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엘리야가) 박해받고 죽었으니 나도
그렇게 박해받고 죽을 것이다.”가 아니라, “그의 고난과
죽음은 나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한 일이다.”입니다.
2) 혹시라도, “엘리야는 엘리야고, 세례자 요한은
세례자 요한이다. 세례자 요한이 어떻게 엘리야일 수가
있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루카복음 1장에 있습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7).”
가브리엘 천사는 즈카르야에게, 엘리야가 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일을 요한이 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 말은, 요한이 곧 엘리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의 모습으로 ‘환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선택하고 보내신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와서,
‘엘리야의 일’을 한 것입니다.>
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라는 말은,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그 ‘확신’은 믿음의 마지막 단계도
아니었고, ‘믿음의 완성’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의 믿음을 기록해 놓은 구절들을 보면,
제자들은 ‘머리로 믿는’ 단계에서 시작해서
‘마음으로 믿는’ 단계를 거쳐서, ‘온 삶을 다 바쳐서 믿는’
단계에 도달하면서 믿음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대부분 그렇게 여러 단계를 거칩니다.
물론 처음부터 한 번에 ‘완성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고,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머리로만 믿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든 믿음이 한 단계씩 나아가거나 그렇지 않은 차이는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노력’의 차이일 것입니다.
4)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는 믿음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계속 읽는 것은,
요한의 ‘회개 선포’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의 회개가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메시아보다 먼저 엘리야를,
즉 세례자 요한을 보내신 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우선 먼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래 믿음과 회개 사이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고, 믿음과 회개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다면 회개할 것이고, 회개한다면 믿을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만일에 회개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는다면,
그 회개는 구원에 연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회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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