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02. 심장이 뛰는 시간 / 임신 5–8주 / 대림 2주)
알아봄의 용기
#알아봄의용기 #존재의존엄 #여성과생명 #만삭낙태법반대
산에서 내려오는 길,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는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이 질문에는 순수한 신학적 궁금증과 함께, 어딘가 기다림에 대한 집착이 묻어 있다.
아직 오지 않았다고, 아직 때가 아니라고,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바꿔 놓는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예언 해설이 아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언제나 '언젠가 도착할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역사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는 선언이다.
문제는 오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다. 알아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알아보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거칠었고, 불편했고, 기존 질서를 흔들었으며, 삶의 방향을 다시 묻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고, 결국 그의 존재를 지워 버렸다.
예수님은 그 이야기를 하시며 자신의 운명까지 함께 비춘다.
"사람의 아들도 그와 같이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나쁜 의도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때로는 보이지 않아서, 때로는 익숙하지 않아서, 때로는 받아들이기에 너무 벅차서, 때로는 두려워서였다.
알아보지 못함은 언제나 악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종종 깊은 두려움과 현실적 한계에서 온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알아봄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임신은 언제나 복잡한 사건이다. 기쁨과 축복으로 맞이하는 순간도 있지만,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마주하는 순간도 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관계의 파탄 속에서, 폭력의 상처 속에서, 건강의 위협 속에서,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삶의 단계에서.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느끼는 두려움과 고통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알아봄의 용기다.
한 인간의 삶 전체가 걸린 선택이고, 그 무게는 오롯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에 실린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을 외면한 채 생명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 복잡함 속에서도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하나의 생명이다. 아직 이름도 없고, 아직 말도 하지 못하고, 아직 스스로를 보호할 힘도 없지만, 이미 심장이 뛰고, 이미 자라고 있으며, 이미 관계 안에 들어와 있는 생명. 이것은 추상적 가능성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이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두 번째 알아봄의 용기다.
그리고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한쪽에는 두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여성의 현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아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생명의 현실이 있다. 둘 다 진짜이고, 둘 다 존엄하며, 둘 다 보호받아야 한다.
문제는 이것을 대립의 구도로만 보는 순간,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여성의 권리 대 태아의 생명, 자기결정권 대 생명권.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선택의 논리가 아니라 돌봄의 논리다. 예수님은 요한이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그 거부를 정당화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동시에, 거부한 사람들을 단죄하지도 않으신다.
대신 그분은 물으신다. "너희는 알아보겠느냐?"
그리고 여기서 세 번째 용기가 필요해진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 둘 다를 돌볼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용기.
진정한 자기결정은 충분한 지지와 자원이 있을 때 가능하다. 두려움만 있고, 외로움만 있고, 경제적 막막함만 있고, 사회적 낙인만 있을 때,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결정이다.
우리가 정말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면, 그 결정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사회가 지지해야 한다. 안전한 주거와 경제적 지원과 의료적 돌봄과 정서적 지지와 직장에서의 보호와 공동체의 환대가 있을 때, 비로소 여성은 두려움이 아닌 자유 속에서 생명을 바라볼 수 있다.
태아의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여성을 비난하거나 그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여성과 생명, 둘 다를 돌보기 위해 우리 사회가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고백이다.
임신한 여성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의 두려움을 함께 나눌 공동체가 있다는 것, 생명을 환대하는 것이 삶의 파탄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만들어 가는 것이 생명 존중의 진정한 의미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개인의 선택을 비난하기보다, 그 선택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
복음은 오늘도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지금, 두려움 속에 있는 여성을 알아보고 있는가. 그를 지지하고 돌보고 있는가. 그리고 동시에,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생명을 알아보고 있는가.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돌보는 것은 그와 연결된 모든 생명을 함께 돌보는 것이다.
이것이 알아봄의 용기다.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복잡한 딜레마 앞에서 쉬운 답을 찾지 않으며, 판단 대신 돌봄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인정하는 것.
작은 이의 기도
주님,
불편한 것을 알아보는 용기를 주소서.
두려움 속에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그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진정으로 함께 지고 나르는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크지 않아도, 말하지 못해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생명을 알아보는 용기를 주소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강요하지 않고
둘 다를 돌볼 수 있는 더 나은 길을 찾는 용기를 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