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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수원 교구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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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가벼운 짐
주님은 오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하는 말씀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부드러운 음성의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주님은 이 초대의 말씀으로, 당신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계신 분임을, 우리에게 닥친 어려운 현실에 늘 주의를 기울이고 계신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주님 오심을 기뻐하는 성탄 축일을 갈망한다는 것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모든 것, 정신적이며 육체적으로 땀 흘려 해야 하는 일들, 피할 수 없이 매일 겪어야 하는 고통, 부대끼면서도 함께 살아야 할 이웃들, 우리 자신을 힘들게 하는 잘못, 죄 등 모든 것을 주님께 말씀드리고 맡겨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향해 다가서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진실한 사람으로 변모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찾아 얻고자 하는 안식을 주시리라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우리를 안전한 은신처에 숨겨두시겠다는 말씀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 오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람이 되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임을 조금씩 알아가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써, 그 십자가를 가볍게 해주시는 온유하고 겸손한 분임을 서서히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짐은 내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짐임을 깨닫고 더욱 힘을 내자고 스스로 다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보다 덜 무거운 짐을 지고 있거나, 아예 짐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웃들을 보면서, 부러워할 때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고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들은 다만 그 고통을 주님과 함께 나누고 있는 사람들, 주님의 도우심으로 기꺼이 짊어지고 걸어가는 사람들이며, 나아가 이웃의 고통을 주님처럼 대신 또는 함께 짊어지는 온유한 삶을 살고 계시기에 행복해 보이는 분들임을 가슴에 담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 짐을 가벼운 짐으로 받아들이고 짊어질 수 있도록 우리를 향해 오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 맞이에, 이웃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살피며 신앙인다운 하루 만들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친 영혼의 안식을 약속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율법의 무거운 짐, 죄의 사슬, 세상의 억압 속에 있는 이들에게 주님은 새로운 길을 제시하신다. 그것은 무거운 멍에가 아니라, 온유와 겸손 안에서 배우는 사랑의 멍에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멍에는 사랑이다. 사랑은 무겁지 않다. 사랑은 짐을 지면서도 기뻐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지는 짐은 오히려 달콤하다.”(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96,5)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멍에는 단순한 규율이나 강제적인 짐이 아니라, 사랑으로 변화된 삶의 태도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말한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무겁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지는 동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그것을 나누시기 때문이다.”(Homilia in Matthaeum 38,2) 우리가 은총 안에서 주님의 짐을 질 때,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지고 계시는 것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에게 계명을 쉽게 지킬 수 있게 해준다. 짐이 무겁지 않은 것은 은총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1828) 즉, 주님의 멍에가 가볍다는 것은 계명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계명이 은총과 사랑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짐은 우리를 무너뜨리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우리를 세워준다.
우리 각자는 일상에서 다양한 짐을 지고 살아간다. 책임, 관계의 어려움, 죄의 습관, 마음의 상처….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단순히 위로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짐을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분이시다. 세상의 멍에→우리를 더 지치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멍에→우리를 더 자유롭게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우리가 세상의 욕심과 악덕의 멍에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주님의 멍에를 질 수 있다. 그분의 멍에는 온유와 겸손의 학교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배운다.
주님 멍에는 우리를 억누르는 짐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은총의 멍에이다. 우리가 그것을 지고 갈 때,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고 가신다. 그러므로 주님의 초대를 듣도록 하자.
“내게 오너라.” 그리고 그분께 배우며, 사랑의 멍에를 기쁘게 메고, 세상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전삼용 신부님_야생마가 날뛰는 동안 조련사는 등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도입] 복수심에 먹힌 영혼, 에이합 선장 허먼 멜빌의 고전 소설 『모비 딕』에는 거대한 흰 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에이합 선장이 등장합니다. 다리를 잃은 상실과 육체의 고통은 그에게 겸손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래에 대한 광기 어린 복수심에 사로잡혀, 선원들의 만류와 불길한 징조들, 그리고 하느님의 경고를 모두 무시했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치며 하느님의 질서에 대항했습니다. "태양을 쳐서 떨어뜨릴 수만 있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칠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작살 밧줄에 목이 감겨 고래와 함께 바닷속 깊은 곳으로 끌려들어 갔고, 그의 배와 선원들을 모두 파멸시켰습니다. 고난을 수용하지 못한 분노는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까지 침몰시킵니다. 고난 앞에서 온유해지지 못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든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전개 1] 신을 죽이고 미쳐버린 초인 이러한 비극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는 평생 극심한 편두통과 시력 저하, 위장병에 시달렸습니다. 육체의 가시는 그를 겸손한 신앙으로 이끌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주는 신을 거부하고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고난받는 인간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을 나약함으로 치부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초인(Übermensch)' 사상을 주장했습니다. "신이 어디 갔느냐고? 내가 말해 주지!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나와 너희들이!"
그러나 하느님의 멍에를 벗어던진 인간 정신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광기에 사로잡혀,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매질 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울부짖다가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멍에를 거부한 자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파멸이었습니다.
[복음]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그 안식의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안식은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는 데서 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분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
하느님의 아드님조차 고난을 통해 순종을 완성하셨다면, 하물며 우리에게 고난은 하느님의 뜻에 길들여지기 위한 필수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신명기 말씀은 광야의 고통이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합니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시험하시어, 뒷날에 너희가 잘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2.16). 광야의 고통은 우리 교만을 꺾고 낮추어(겸손), 복을 받을 그릇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입니다.
[전개 2] 이곳이 나의 대성당이다 고난 앞에서 온유해질 때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분이 있습니다. 베트남의 반 투안 추기경입니다. 젊은 주교였던 그는 공산 정권에 체포되어 빛도 없는 독방에 갇혔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제가 밖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여기에 썩게 두십니까?"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바꿨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원한다. 이곳이 그분이 원하시는 자리라면 여기가 나의 교구다."
그는 몰래 들어온 포도주 세 방울과 물 한 방울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감옥이라는 현실에 온유하게 순명하자, 그 더러운 독방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대성당이 되었고, 그를 감시하던 간수들은 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고난에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때, 고난은 더 이상 그를 가두지 못했습니다. 안식이 시작된 것입니다.
[심화] 야생마와 야곱 몽골의 초원에서 야생마를 잡아 길들일 때, 조련사는 말의 등에 올라타 끝없이 날뛰게 둡니다. 말은 자유를 뺏기지 않으려고 뒷발질을 하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저항합니다. 이것은 말에게 엄청난 고통입니다. 하지만 말이 탈진하여 거품을 물고, 조련사의 뜻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멈춰 서는 순간, 비로소 '교감(Joining up)’이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말의 야성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신호에 따라 천 리를 달리는 '명마의 능력'으로 승화됩니다. 고난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힘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재갈입니다.
구약의 야곱도 평생 잔꾀와 자신의 힘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뽁 강가에서 천사와 밤새 씨름하다가 엉덩이뼈(힘의 근원)를 얻어맞고 나서야 깨어집니다. 더 이상 제 힘으로 설 수 없게 된 야곱은 천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당신이 저에게 축복하지 않으시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창세 32,27). 자기 힘이 꺾인(위골된) 그 순간, 그는 '사기꾼 야곱'에서 '하느님과 겨룬 자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만을 의지하도록 때로는 우리 힘의 근원을 치십니다.
[결론] 온유해지면 고난이 멈춘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지금 감당하기 힘든 고난 속에 계십니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나" 억울하고 분하십니까? 그렇다면 아직 훈련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야생마가 날뛰는 동안 조련사는 등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고난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에이합 선장처럼 저항하면 파멸하지만, 반 투안 추기경처럼 온유하게 받아들이면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품 안에서 쉬게 하려고 길들이시는 중입니다. 오늘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제 고집을 꺾으소서. 당신의 뜻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이제 저항을 멈추고 당신의 멍에를 메겠습니다."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바로 그 순간, 고난의 폭풍은 멈추고 주님의 안식이 우리 영혼에 깃들 것입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예수님의 멍에?'
오늘 복음(마태11,28-30)은 '내 멍에를 메어라.'는 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을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은 '당시 유다교의 수많은 율법 규정에 얽매여 사는 이들에 대한 부르심'이며,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 곧 영과 육의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삶에 지친 이들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9-30)
'예수님의 멍에?'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라.'는 메시지, '이 순종 안에서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삶을 살아가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의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종하셨고,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8,31ㄴ-32)
우리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는 이유, 진리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쁨과 자유와 해방이라는 부활'입니다.
'그런 은총이 여기에 있는 나에게 내려지도록,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날마다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합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40,29.31/오늘 독서)
(~ 에즈6,22)
<주님의 ‘참안식’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1) 여기서 ‘고생’과 ‘무거운 짐’은, 좁은 뜻으로는 유대교의
율법들을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인생살이’를 뜻합니다.
‘너희’는 ‘모든 사람’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모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이고,
“나에게 오너라.”는 “나에게만 오너라.”입니다.
진정한 안식, 평화, 구원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이신 분’으로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입니다.
이 말씀의 ‘안식’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얻기를 바라는
구원, 생명, 평화, 기쁨, 행복 등이 모두
총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입니다.
여기서 “오너라.”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입니다.
“오너라.”는 우리 쪽에서 ‘능동적인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만,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2) 정말로 겸손한 이는 자기 입으로 “나는 겸손하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려고 마태오 사도가 덧붙인 말로 해석합니다.
어떻든 이 말은, 예수님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분이 아니라,
‘섬기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안식은
‘섬기는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 ‘참안식’을 주시는 일 자체가 ‘사랑’입니다.>
여기서 ‘내 멍에’ 라는 말과 ‘내 짐’이라는 말은 ‘반어법적
표현’이고,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뜻합니다.
<주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결코 멍에와 짐이 아닙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온갖 억압과 압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이고, 우리에게
참된 안식과 평화를 주는 ‘특효약’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멍에’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오해하는 사람이고,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멍에를 ‘없애려고’ 오신 분이지 당신의 멍에를
‘새로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가벼워도 멍에는 멍에일 뿐이고,
멍에가 있는 한 참된 안식은 없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앞의
안식을 주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다시 확인하신 말씀이고,
우리 쪽의 응답과 노력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는 ‘그러면’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즉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
참안식을 얻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즉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참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3)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너희의 멍에와 짐을 없애는
‘편안함’이고 ‘가벼움’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하면, 모든 멍에와
짐에서 해방되고, 편안함과 가벼움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판공성사(고해성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탄절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는 일이 ‘멍에’인가?
실제로 고해성사를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회개를 하지 않거나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멍에’와 ‘멍에를 없애는 열쇠’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회개하고 고해성사를 보는 사람은
‘영혼의 자유와 평화와 가벼움과 기쁨’을 체험합니다.
4) 루카복음 13장에 있는, ‘등 굽은 여자를 안식일에
고쳐 주신 이야기’는, ‘멍에를 없애 주시는 예수님’을
잘 나타냅니다(루카 13,10-13).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회당장은,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셨다고 화를 냅니다(루카 13,14).
여자는 예수님 덕분에 ‘병마’ 라는 ‘멍에’에서 해방되었는데,
회당장은 안식일 율법이라는 ‘멍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던 그를 병마에서
해방시켜 주셨는데(요한 5,5-9), 그는 병이 치유되었다는
기쁨보다 안식일 율법을 어긴 것 때문에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요한 5,15).
그 모습이 바로 ‘멍에’에 짓눌려 있는 모습입니다.
<멍에의 종류가 무엇이든지 간에, 멍에를 벗어버리는 방법은,
스스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것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대림 제2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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