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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 중심의 축제인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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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6.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말라3,19-20ㄴ 2테살3,7-12 루카21,5-19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 중심의 축제인생의 삶”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시편98,9ㄱ)
예나 이제나 또 앞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단 하나일 것입니다. 물어야 답이 나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물음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묻는 자가 수도자라했습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참으로 진짜 참으로 살기 위해 누구나 날마다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11월 위령성월, 다음 주일은 마지막 연중 제34주일이자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오늘 연중 제33주일, 제9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레오 14세 교황은 “주, 하느님, 당신만이 저의 하느님이십니다”(시편71,5) 제목의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감동적인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가장 큰 가난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우리가 소유하는 무엇이든 우리를 더욱 공허하게 만들 뿐입니다...사랑은 가장 큰 사회적 계명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교회에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삶으로, 말과 지혜로 우리에게 복음의 진리를 접하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고자 몸소 그들의 가난을 입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애덕의 문제이기에 앞서 정의의 문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대는 주린 이에게 빵을 줍니다. 그러나 아무도 굶주리지 않는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대는 헐벗은 이에게 옷을 줍니다. 그러나 모두가 옷을 입어 그러한 궁핍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가장 큰 가난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라는 말마디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진짜 가난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찌보면 생노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 바로 가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난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죽음 앞에서 환히 드러나는 가난의 실상입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너나할 것 없이 죄와 병중에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진정 부유한 사람은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그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이요, 이런 이는 가난중에도 결코 인간품위를 잃지 않고 삽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에 대한 답이 나왔습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가난해도 단순소박한 품위있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은총의 샘이며 생명의 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주님과 함께,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첫째, 종말을 늘 염두에 두고 사는 삶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구체적으로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하십니다. 하루하루 잘 살아 보라고 선사되는 하느님의 선물같은 날들입니다. 말라기서에 종말의 심판과 구원이 실감나게 표현됩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두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구원도 선택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구원의 하느님을 선택해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바로 행복과 구원의 하느님을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여러분들은 진짜 지혜로운 영적 부자들입니다.
둘째, 오늘 지금 여기 제자리에서 본분에 충실한 삶입니다. 바로 고맙게도 바오로가 자기 일행의 삶을 통해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각자 삶의 제자리에서 제 책임을 다하며 허영이나 거품, 탐욕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진실하고 순수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 무질서 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양식을 벌어먹도로 하십시오.”
하느님 중심의 질서있는 삶이 건강한 삶이자 이웃에게도 선물같은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어버릴 때 무질서한 삶이요 저절로 내적으로 무너지기 마련이요 이웃에게나 하느님에게나 짐이 되는 삶입니다. 민폐를 최소화하여 짐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같은 삶을 살아가는 바오로 일행은 우리 믿는 이들 삶의 영원한 모범입니다.
셋째, 끝까지 버텨내고 견뎌내는 인내의 삶입니다. 삶의 중심인 제자리의 주님께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희망찬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결코 일희일비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이 안정과 평화의 삶을 삽니다. 복음 말씀처럼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여도,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오고, 이런저런 재앙이나 박해에도 결코 경거망동, 부화뇌동함이 없이 요지부동 제자리를 지켜냅니다. 복음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
바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희망이 무궁한 힘의 원천이 되어 끝까지 버텨내고 견딜수 있는 인내력을 줍니다. 마침 지난 14일 한미 팩트시트 타결과 관련하여 이대통령의 인터뷰중 공감이 가는 한 대목을 나눕니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추가로 새롭게 얻어내기 위한 능동적 적극적 협상을 하는 게 아니고, 상대의 요구에 의해서 국제질서 재편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손실을 최소화해야 되는 그런 일종의 비자발적 협상을 해야 되는 그런 상황에서는 우리가 가진 최대의 무기는 버텨내는 것 하나뿐이었다.”
정말 협상과정을 보니 끝까지 최선을 다한 초인적 인내의 견뎌내기, 버텨내기 과정이었음을 봅니다. 오죽하면 영혼을 갈아넣을 정도고 총체적 노력을 다했다 고백했겠는지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고해의 현실중에도 찬미와 감사의 축제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구원과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1.종말을 늘 염두念頭에 두고 사는 삶, 2.오늘 지금 여기 제자리에서 본분에 충실忠實한 삶, 3.끝까지 버텨내고 견뎌내는 인내忍耐의 삶”
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게 합니다. 찬미와 감사의 부유하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축제인생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온누리를 의롭게,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신다.”(시편98,9ㄴ).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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