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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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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교수님의 ‘잡동산이(雜同散異)’를 읽고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백과사전이고, 재미있게 말하면 만물상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교수님은 근대와 현대에 걸쳐 들어온 문물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사용하는 것들이 100년 전에는 생소한 물건들이었습니다. 그중에 ‘안경’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장애인을 부를 때 ‘절름발이, 앉은뱅이, 귀머거리’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이’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장애인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장님, 봉사, 소경’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장님은 지팡이를 든 어른을 뜻하고, 봉사는 고려시대의 벼슬 이름이라고 합니다. 소경은 조선시대의 벼슬 이름이라고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더 존중하는 의미로 불렀다고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안경은 현대인에게는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강한 햇빛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선글라스도 있고, 근시와 난시로 인해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다초점 렌즈’로 만든 안경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저도 2005년부터 안경을 썼으니 20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감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욕망과 이기심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이웃의 아픔과 고독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헐벗은 이웃의 아픔을 모릅니다. 굶주린 이웃의 배고픔도 모릅니다. 믿음의 눈이 있는 사람은 풀잎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작은 벌레에게서도 하느님의 창조를 볼 수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귀로 들으면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공감하는 마음이 있으면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에도, 바람 소리에도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 도움을 청하는 이웃의 외침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식당 탁자 위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산다.’ 분명 우리는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과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끝이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실하게 다가올 죽음을 준비합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연결되지 않는 신앙은 힘이 없고, 생기가 없으며, 위기와 고통의 순간이 찾아오면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연결된 신앙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신앙은 늘 기쁨이 충만하고, 즐거우며,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면서 믿음만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곳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고, 좀이 생기고, 남이 와서 빼앗아 가기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곳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이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가장 믿을 만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 이후에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세상의 곳간에 쌓아 놓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