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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 수원 교구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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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
[말씀] ■ 제1독서(이사 2,1-5) 기원전 8세기의 예루살렘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던 남 유다 왕국의 수도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웃 강대국들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유다의 주민들로서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하여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적 위기 속에서 지도계급 출신인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전제로 수도와 왕국에 대한 찬란한 미래를 예고합니다.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 늘 하느님을 향하여 서 있다면,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은 새로워진 세상의 한가운데에 자리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 제2독서(로마 10,9-18) 유다교도들에게 하느님은 율법 준수 여부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리시는 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기까지에 이른 이와 같은 의식은 결국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기본 신앙을 망각한 데서 빚어진 결과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읽고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그분의 사랑은 무상적이며 무한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온몸으로 그대로 전해 줄 사람들과 사명 의식이 필요합니다. ■ 복음(마태 28,16-20)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예수님은 당신의 사도들에게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그들이 모두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라는 사명을 내리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이념을 수용하여 그 이해집단의 구성원이 된다고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스승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도들이 철저하게 체험했던 대로 하느님의 삶에 동참하는 삶을 말하며, 이 삶은 나누고 베푸는 일상적인 삶을 통하여 지상에서 우선 구현되어야 할 삶입니다. [새김] 모세 시대 시나이산에서 계약이 체결되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 계약의 궤가 예루살렘 성전에 모셔진 이래 이스라엘 백성의 선민의식은 꽃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선택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한 나머지 선택에 따른 사명을 소홀히 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사야 등과 같은 예언자들이 잘못된 선민의식에 대한 반성과 질책을 소리 높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택은 하느님의 무상적인 은총의 결과였기에, 이스라엘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일상적인 삶 가운데 실천하고 전해야만 했습니다.
선택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약속해 주는 은총의 표지라면, 세례성사를 통해 선택을 확인한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선교사명은 선택의 순간부터 이미 주어진 셈입니다.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하느님과의 친교의 삶 속에 살면서 우리는 마땅히 이 사랑, 이 생명의 만남을 이웃들과 나누고 확인해야 하며, 하느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가 이 땅 위에 세워질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이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어낼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을 힘차게 선포하며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복된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28,16-20: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1. 선교하는 교회의 본질 오늘 전례는 “교회는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Ad Gentes, 2항)임을 새롭게 일깨워준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기 보존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과 복음을 위한 파견에 있다.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 15항)는 “교회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복음 선교 활동에서 생겨났으며, 그것의 열매이자 결과”라고 분명히 말한다. 따라서 선교는 부수적인 활동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핵심이다.
2. 하느님의 자기확산과 선교 교부들은 하느님의 선과 사랑이 본성적으로 ‘확산적’임을 강조한다. 성 디오니시오 아레오파기타는 “선은 자기 자신을 나누어주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하였고(De Divinis Nominibus, IV,1),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자신 안에 머물 수 없고 터져나가야 한다.”(De Trinitate, VIII,10)고 말한다. “Bonum est diffusivum sui: 선은 자기 확산성을 가진다.”라는 전통적인 격언처럼, 하느님은 지극한 선으로서 자신을 인류에게 주시고자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셨다. 그러므로 선교는 단순히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기확산, 곧 사랑의 흐름에 참여하는 사건이다.
3.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하시며 세례와 가르침의 사명을 맡기신다. 동시에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약속을 주신다(20절). 이 말씀은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하느님이다”(탈출 3,12; 이사 41,10)라고 하신 말씀과 이어진다. 이제 교회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가며,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파견된 공동체가 된다.
4. 우리 민족과 복음화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다. 이 피는 선교의 열매이며, 동시에 새로운 복음화의 원천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역사와 민족의 심장 속에 뿌리내려야 하며, 그 문화를 정화하고 완성시켜야 한다.”(Ad Gentes, 10항)라고 가르친다.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 평화적 통일이 곧 복음화의 중요한 목표이다.
5. 삶의 적용 기도와 파견의 삶: 선교는 특별한 사람들의 임무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소명이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가정, 직장, 사회 안에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사랑의 나눔: 하느님의 사랑은 나눌 때 확산한다. 가난한 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할 때 우리는 복음의 진정한 증인이 된다. 민족 복음화를 위한 기도: 특히 우리 민족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남과 북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결론 선교는 교회의 의무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속으로 흘러넘치는 사건이다. 오늘 전교주일에 우리 각자가 “복음을 전하는 제자”로 새롭게 파견되도록 기도하자.
전삼용 신부님_‘이것’으로 불렸다면 이미 성공한 인생이다
저는 자주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를 고민하였습니다. 스승이 되라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왠지 선교와 스승이 된다는 것이 잘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으신 당신께서 우리가 스승이 되려고 할 때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선교는 가장 큰 사랑의 실천입니다.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주지 않고, 불구덩이에 떨어지는 자녀를 보고만 있는다면 그건 사랑이 없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하늘 공동체에 속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직행 티켓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선교해야 할지는 잘 모릅니다. 예전처럼 선교하다 순교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가두선교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집을 방문하면 다들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오늘 복음에서 ‘스승’이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옮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의 스승님!”이라고 불렸던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완성은 ‘스승님!’이라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나이만 조금 들으면 여기저기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존경스럽지 않은데 어떻게 선생님이라 할 수 있을까요? 배울 것이 없는데 어떻게 스승님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요즘 세상에서 스승이라 불려도 될 만한 사람을 새로 찾아냈습니다.
바로 ‘박진영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입니다. 이는 장관급이라고 합니다. 왜 대통령이 박진영을 장관급에 앉혔을까요? 박진영 씨의 재산은 수천억에 달합니다. 얼굴이 못생겨서 처음에 가수를 하겠다고 할 때 단 한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실력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10년 이상을 견디어 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최고 작곡가인 김형석 씨에게 음악 프로듀싱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방시혁 씨와 함께 JYP를 세웠고 정지훈 씨를 키워내면서 회사를 성공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성공은 했는데, 가슴 한편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한 거예요. 지금까지 성공을 바라보며 살았는데, 이젠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을 향해 달려가기로 했습니다.” 누가 존경받을까요? 바로 ‘덕’이 있는 사람이 존경받습니다. 가수 비 씨의 어머니가 아플 때 박진영 씨는 모든 일정을 접고 그의 집에 와서 어머니를 업고 병원으로 모셨습니다. 정지훈 씨는 어머니를 살린 것이 박진영 씨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유명해지면 가장 밑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해야 한다고 ‘겸손’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그의 몸 관리는 철저하다 못해 처절합니다. 하루 한 끼 먹으며 운동은 2시간씩 합니다. 아프면 아무것도 못 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은 후배에게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60이 되어서도 젊었을 때보다 더 춤을 잘 춘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합니다.
대부분 연예인들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그냥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지만, 박진영 씨처럼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스승’이 되려고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진영 씨는 진짜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길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입니다. 바로 존경받는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G.O.D.의 김태우 씨는 박진영 씨에게 많이 혼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2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김태우 씨가 유명해져서 술에 취하고 사람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자 인기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듣고 싶으셨던 칭호는 무엇이었을까요? ‘스승’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이었고 가장 큰 선교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죽을 때까지 행복하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오마하의 현인’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현인도 스승과 같은 말입니다. 바로 ‘워런 버핏’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는 주식으로 세계 제1의 부자였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사랑받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가르침을 통해서입니다.
그도 스승이 되고자 했습니다. 누군가 자발적으로 그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게 된다면 이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스승이 되라고 하시며, 그것이 이 세상에서 달성하고 와야 할 가장 큰 목표이자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십니다.
스승이 되려면 ‘지-덕-체’의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지(智)는 지식이고 지혜이고 실력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가르칠 것도 없습니다. 덕(德)은 겸손함입니다. 교만하면 제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제자를 이용해 자기를 채우려 합니다. 체(體)는 건강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하였습니다. 제 몸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서 누구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선교는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스승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사명을 완수한 것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저의 스승이기도 하셨습니다.”라는 말씀을 들으면 부모님은 얼마나 기쁘실까요? 낳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잘 길렀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표도 스승이어야 합니다.
한국 가톨릭의 위대한 스승이 계셨습니다.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만이 아니라 많은 비신자들에게도 존경의 대상이었고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몸을 혹사해서 일찍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지덕체의 완전함으로 톤즈 아이들이게 참 스승이셨고, 그래서 그분을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성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스승이 됩시다. 가톨릭 스승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나는 스승이 되기 위해 어떤 실력을 연마하고 있습니까? 또 어떤 덕을 닦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존경받습니까? 매일 건강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합니까? 이것이 안 된 상태에서 아무리 선교하려고 해봐야 비웃음만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하늘에 오르실 때 500명이 넘는 제자들이 그분을 바라보았듯이, 우리도 수많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주님께 갈 수 있어야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할 것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28,19)
'믿는 이들의 사명이자 순교인 복음화!'
오늘 복음(마태28,16-20)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사명이 바로 '복음화의 사명인 선교'입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가 드려지는 전교 주일'입니다.
'복음화의 본질은 무엇이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복음화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묵상입니다.
'복음화'는 예수천국불신지옥의 외침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이 되는 것, 곧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화'는 복음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내가 기쁨이 되고, 사랑이 되고, 겸손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화의 본질'이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복음화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복음화가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너나 믿으세요!" 라는 말로 우리의 선교를 외면할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최고주의와 그리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라는 세상 가치의 홍수 속에서 내가 먼저 복음화가 되고, 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복음화는 사명이자 순교'입니다.
이 '복음화 순교'를 위해서, 내가 먼저 믿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들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선포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파견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머무는 삶의 자리는 '복음화의 현장'입니다. 복음화를 위해 삶의 자리로 파견된 그리스도인들은 '말과 행동으로, 곧 삶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먼저 복음이 되는 선교사, 기쁘게 사는 선교사가 됩시다!
(~ 1열왕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