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가 불세출의 대 교육자이자, 청소년 동반의 달인이 된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당시 어른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토리노 뒷골목 아이들을 진심으로 환대하고, 그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이 부르짖는 신음 소리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것입니다. 돈보스코는 대주교님이나 토리노 시장이 오시거나 길거리 청소년이 오거나 상관없이 그 누구에게나 밖에 나가서 환영했습니다. 10살짜리 코흘리개 아이가 찾아와도 기쁘게 환대했고, 당신 사무실로 안내하고서는 그에게 상석을 권하고 자신은 옹색한 작은 의자에 앉았습니다. 토리노 뒷골목의 10살짜리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뻔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보스코는 세상 중요한 이야기인 듯,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경청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해주었습니다. 그가 겪고 있는 괴로움과 하소연을 흘려듣지 않고 귀담아 들었다가, 어떻게든 그를 도와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런 돈보스코의 모습에 아이들은 완전히 반했습니다. 아이들은 돈보스코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나중에는 삶조차 빼앗겼습니다. 나중에 위대한 남미 선교단 단장으로서 추기경이 된 칼리에로는 결코 사제나 수도자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돈보스코가 너무 좋아서, 인생이 그렇게 꼬여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환영받는 느낌, 대우받는 느낌, 그것은 돈보스코가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을 빼앗는데 첫 번째 비결이었습니다. 환대는 신앙공동체의 필수적인 실천 사항입니다. 성서 메시지의 근본이며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 요소입니다.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 하나는 ‘소통의 단절’입니다. 인간 각자가 마치도 고립된 섬과도 같습니다. 같이 살아도 진정으로 같이 살지는 않습니다. 대화를 하고 있지만 진정한 대화가 아닙니다. 따라서 공감(共感)할 줄 안다는 것, 이 시대가 요청하는 참으로 큰 미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감의 능력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 냉담함입니다. 무표정입니다. 분위기 한번 반전시켜보려고 ‘생쑈’를 다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별의 별짓을 다해도 그저 심드렁한 얼굴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다해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저 소 닭 보듯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똑같은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릇된 신앙, 왜곡된 논리에 젖어 허우적거리며 죽음의 길로 빠져들던 율법학자들, 두렵고 경직된 얼굴로 하루하루 두려움 속에 힘겹게 살아가던 바리사이들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당신에 앞서 파견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새 출발을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자는 마귀 들렸다’며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참수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했던 메시아 예수님이 도래하셨습니다. 이분까지도 ‘먹보요 술꾼’이라며 거부합니다. 십자가형으로 몰고 갔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결정적 실수 그 배경에는 경직된 신앙이 있었습니다. 새로움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뻣뻣한 목덜미가 있었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부드러움이 인류를 구원합니다. 편안함, 친절함, 편안함, 넉넉함, 통틀어서 ‘호감’이 새 세상을 건설합니다. 호감이 지닌 매력은 생명력입니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호감 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런 사람은 존재 자체로 매일 이웃들에게 큼직한 선물을 건네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를 건네는 사람이며 행복을 주는 사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