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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간 수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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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 수련 피정 중에 ‘관대함과 무관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관대함의 출발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무관심의 출발은 이기심과 게으름입니다. 제갈공명은 관대함으로 월국의 왕을 다스렸습니다. 제갈공명은 월국의 왕을 일곱 번 잡았지만, 일곱 번 놓아 주었습니다. 제갈공명의 자비에 탄복한 월국의 왕은 제갈공명의 뜻을 따라서 초나라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성서의 곳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관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땅에서 고난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해 주십니다. 이것이 파스카의 시작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하리라.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놓아주었습니다. 사울이 하느님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관대함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에서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관대함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측은한 마음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눈먼 사람은 눈을 뜨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고, 중풍 병자는 일어나게 하셨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율법 학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 에로 초대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관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 돌보아 주지 않았다.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무관심의 결과를 잘 드러내는 글이 있습니다. “나치가 사회주의자를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그들이 노동 조합원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 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관심은 이기심과 게으름을 먹고 자라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관대함으로 드러나는지, 무관심으로 드러나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과 계단의 끝까지 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쉽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이제 막 시작했는데 벌써 결말을 예측합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볼 것은 단식과 옷차림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그의 설교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보고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했던 그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에게 볼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겉모습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그분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빌어주시는 자비입니다. 담대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도 깨끗하게 하셨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게 하셨고,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은 어찌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 의심이 자꾸만 다른 곳을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의지하는 건 오해와 거짓이라는 손가락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