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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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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루카 7,11-17).”
1)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입니다. 여기서는 군중이 한 말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이 말은, “예수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요한복음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ㄱ).” 바오로 사도는,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고백합니다(콜로 1,15). 이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2)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본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라고 찬양한 것은, ‘예수님의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1-22).” ‘예수님의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믿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아마도 ‘나인 고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라고 말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을 ‘하느님의 일’로 인정하긴 했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니고, 옛날의 예언자들과 같은 위대한 예언자로만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죽은 젊은이를 살리신 것은 그의 어머니를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과부만 가엾게 여기신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3-35).”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전체 인류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자비’입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신 것은, 라자로만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4) 13절에서, 복음서 저자가 갑자기 ‘주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이고, 동시에 우리가 처해 있는 여러 가지 딱한 처지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입니다. 만일에 자비는 있는데 권능과 권한이 없다면, 가엾은 사람을 위해서 아무것도 못하고, 그러면 ‘주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권능과 권한은 있는데 자비가 없다면? 자비 없는 신이 구세주가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인간을 가엾게 여기시는 ‘자비의 주님’이시고, 인간을 구원하는 ‘힘’을 가지고 계시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며 울고 있던 그 어머니에게 예수님께서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