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물고기 입 속의 동전, 그 기이한 기적의 진짜 의미> 복음: 마태오 17,22-27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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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셔야 하는데, 그냥 주머니에서 꺼내 주시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굳이 베드로를 바다에 보내 낚시를 시키십니다. 그리고는 처음 낚은 물고기 입에서 동전 하나를 찾아, “나와 네 몫으로” 성전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전능하신 분의 행동치고는 너무 번거롭고,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왜 이런 비효율적인 기적을 행하셨을까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앞에서는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돌아가셔야 함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너무 슬퍼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 수난과 부활에 대한 필연성을 이해시켜야만 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성전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성전세를 내지 않으면 성전에 들어갈 자격을 잃습니다. 여권이 없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성전세는 누가 낼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다 밑의 물고기 한 마리가 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물고기는 요나의 기적에서처럼 죽음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베드로가 성전,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유일한 자격을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만 구원에 이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하셨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사에 김익두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원래는 황해도를 주름잡던 악명 높은 주먹대장이었죠. 그가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된 뒤, 예전의 그를 알던 사람들이 시비를 걸며 그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으면서도 끝까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어떻게 그 모욕을 참았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당신들이 알던 주먹대장 김익두는 이미 죽었소. 죽은 사람이 어떻게 화를 내고,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주먹을 씁니까?” 김익두 목사님은 자신이 신앙을 가졌을 때 이전의 자신은 죽었다고 부고장까지 돌렸다고 합니다. 이렇듯 새로운 사람이 되려면 이전의 내가 죽었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구원자가 아니라 유익한 분으로 여기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익한 분이 아니라 그분 없으면 구원이 없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필요한 것은 ‘슬기로운 감방 생활’에 대한 유익한 책이 아닙니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감옥 문을 열어줄 ‘사면권’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을 변화시킨 것은 ‘앞으로 착하게 살자’는 유익한 다짐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나는 이미 죽었다’라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죽었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이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거스르는 믿음은, 과연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혹시 갯벌이나 유사(流沙)에 빠졌을 때 살아나오는 법을 아십니까? 얼마 전 흥미로운 생존법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갯벌에 빠졌을 때, 본능적으로 다리를 빼내려고 허우적거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몸 주위에 진공 상태가 만들어져, 펄은 더욱더 강한 힘으로 몸을 빨아들입니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더 빨리 빠져들어 가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정반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몸부림을 멈추고, 차라리 갯벌 위로 편안하게 드러누워야 합니다. 몸의 무게를 펄 전체에 분산시켜 접촉 면적을 넓히는 겁니다. 그러면 다리를 옭아매던 압력이 사라지면서, 신기하게도 다리가 스르르 떠오릅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을 멈추고, 나를 삼키려는 그 펄에 온전히 내 몸을 맡기고 ‘죽은 듯이’ 누울 때, 역설적으로 생명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과 우리 신앙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라는 갯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내 힘으로 발버둥 칩니다. ‘노력’과 ‘결심’이라는 이름으로 허우적거릴수록, 우리는 죄책감과 자기혐오라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우리가 죄에서 빠져나오게 ‘노력하게 만드는 분’으로 만들지 맙시다. 예수님은 유익한 분이 아니라 구원자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니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구원합니다. 만약 갯벌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뭍에서 어떤 사람이 소리칩니다. “거기서 힘을 빼고 드러누우시오!” 여러분, 그 말을 선뜻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 비상식적인 말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바로 내 옆에서 똑같이 펄에 빠졌던 사람이, 바로 그 방법으로 살아나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한다면 어떨까요? “제가 해 봐서 압니다. 저를 믿고, 당신의 몸을 펄에 맡기십시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고, 그 죽음을 이겨낸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이미 죽은 몸으로 사셨습니다. 처음부터 돌아가실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은 듯이’ 당신을 온전히 성부 하느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음의 중력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죽음의 갯벌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을 당신 스스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만이 죽음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실제적 권능을 지니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만이 '옛 자아의 죽음'을 선포하고 그것을 영적 현실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하는 일은 작은 죽음입니다. 그리고 부활이 따름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억이 나중에 순교하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익한 조언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친히 죽음이 되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입장료를 “나와 네 몫으로” 대신 지불해주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