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2일 (화)
(녹)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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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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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25-08-11 ㅣ No.184068

 

2025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의

한 남성이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서는

“신부님, 아무도 저를 안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너무 슬픕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제가 곧바로 그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이 남성을 따뜻하게 꼭 안아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깜짝 놀란 다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신부님!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제가 노숙 생활을 오래 해서

온몸에 벼룩이 가득합니다.”

그 뒤 신부님은 어떠하셨을까요?

온몸에 가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가졌던 사랑의 마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포옹은 분명 아름다운

행위이지만, 벼룩으로 인해 괴로운

행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포옹 자체는

쉽지만, 벼룩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랑의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벼룩’으로 호칭 되는 이유가

붙게 되면 그 사랑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랑을 실천해도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로

사랑 자체가 지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사랑 실천에 이유를 붙여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로 사랑이 지워지고, 나의 행복도

또 기쁨도 생기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을 것이다.”(마태 17,22)라면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퍼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죽음’에만 마음이 사로잡혀 ‘부활의 희망을

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이어지는

고통과 시련이지만, 사랑으로 모두

받아들이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주님의 사랑은 배려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성전세 사건 역시 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유다인들처럼 예루살렘 성전 유지와

제사를 위한 세금인 성전세를 낼 의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이 성전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세금을

내십니다. 불필요한 논쟁으로 복음 선포가

방해받지 않도록 겸손과 배려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 자체만을 바라보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과연 사랑만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조건을 붙이고, 나의 욕심을 더하면서 오염된

사랑만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처럼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중심에는 무한히 공급되는

사랑이 있다. 절대 고갈되지 않는다.

(루이스 헤이)

사진설명: 성녀 클라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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