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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종교적 의무’를 실행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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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2-27)”
1) ‘성전 세’는 성전 유지를 위해서 유대교에서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세금입니다(탈출 30,11-16). 따라서 ‘성전 세’는 ‘사회적 의무’가 아니라 ‘종교적 의무’입니다.
2)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마태 16,16), ‘성전보다 더 크신 분’입니다(마태 12,6). 그래서 성전 세를 낼 의무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것은,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또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라는 점에서, 성전 세를 내신 일은 세례를 받으신 일과 비슷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마태 3,13-15).” 죄가 없으신 분이니 ‘회개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데도 예수님께서 그 세례를 받으신 것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십자가 수난’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죄 없으신 분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당신의 목숨을 내주셔서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 즉 죄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신 일(대속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이 앞장서서 걸어가신 속죄의 길”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앞장서서 걸어가신 그 길을 뒤따라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사실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3) 27절의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라는 말씀의 원문은, “그들이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입니다. 이 말씀은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정당한 직무 수행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라는 번역은, 예수님께서 현실과 타협하신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안 좋은 번역입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도,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고, 그래서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직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4) 성전 세를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작은 기적’을 행하시는데, 그 일은, 봉헌은 ‘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 가운데 일부를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라고 해석됩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잡은 물고기를 시장에서 팔아서 돈을 마련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돈을 ‘노동의 대가’로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고, 또 만일에 그렇게 해서 마련한 돈으로 성전 세를 낸다면, 또는 하느님께 봉헌한다면, ‘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린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5) 어떤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1-44)”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가진 것을 모두 다 바친 그 ‘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모두 되돌려 드린다는 그 ‘믿음’과 그 ‘마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들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에서 일부만 바친 사람들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