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연중 제14주일 <왜 평화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평화를 줄 때 더 큰 평화가 오는가?> 복음: 루카 10,1-12.17-20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평화의 사명’으로 파견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으면 주님이 주신 평화를 전하라는 복음 전파 사명으로 파견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평화의 사명으로 파견되는 것이 왜 기쁨으로 끝날까요? 그러한 사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왜 기쁠 수 없는지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평화의 사명이 없는 사람들이 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느냐면 필연적으로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명령을 수행하며 삽니다. 대부분은 자아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자아는 생존이 목표입니다. 그런 자아의 명령을 받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만날 때 기본적으로 ‘어떻게 하면 나를 평화롭게 할까?’를 생각합니다. 평화란 생존에 대한 보장입니다. 육체의 생존을 보장받고자 하는 이들은 돈과 맛과 힘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될까요? 이런 것을 추구하면 외로워집니다. 누구도 자신들에게서 돈과 맛과 힘을 빼앗는 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기는 자기 평화를 위해 남의 피를 노립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음을 압니다. 모기약에 죽을 수도 있고 손바닥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찮은 평화를 위해 그런 두려움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영화 ‘에비에이터’가 그려내는 억만장자 하워드 휴스의 삶은, 자기 생존을 위한 평화만을 추구하는 ‘모기’와 같은 인생이 결국 얼마나 비참한 파멸로 끝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그의 비극은 유년 시절, 어머니가 심어준 깊은 불안감에서 시작됩니다. 영화의 초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목욕시키며 세상의 세균에 대해 경고합니다. “너는 안전하지 않아(You are not safe).” 이 말은 단순한 위생 교육을 넘어, 세상은 위험하고 너는 언제든 오염될 수 있다는 공포의 씨앗을 그의 영혼 깊숙이 심어놓습니다. 여기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돈과 여자와 권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타인의 돈과 힘, 쾌락이라는 피를 빨아먹으며 자신의 생존과 평화를 보장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재정적 상황이 불안해질수록 그의 강박증은 더욱 심해져,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자신을 어두운 방 안에 격리합니다. 세균이 두려워 통조림만 먹고, 손톱과 머리카락이 흉측하게 자라도 내버려 둔 채 자신만의 감옥에 갇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나를 살리려는 마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타인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아가 명령하는 것을 안 들으려면 그와 반대되는 내어줌의 명령을 내리시는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아야 합니다. 저도 사실 저의 평화를 위해 살 때는 언제나 불안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완전히 다른 사명, 곧 “이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삶이 아닌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자!”를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그 집의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다른 이의 평화를 위해 살라는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 여인으로 살다가 어머니가 되면 어떨까요? 자신이 한 여자였음을 잊고 이젠 자녀에게 평화를 주어야만 하는 사명으로 다가갑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아내에게 남편은 평화를 줍니다. 만약 자녀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면 어떨까요? 평화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의 평화가 다시 돌아옵니다. 호세아 예언자의 삶은 하느님께서 한 인간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얼마나 절절하게 드러내시는지를 보여주는 한 편의 살아있는 비유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가서 음행하는 아내를 맞아 음행의 자식들을 낳아라. 이 나라가 주님을 버리고 음행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호세 1,2)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처음부터 호세아의 결혼이 그의 개인사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깨어진 관계를 상징하는 공적인 예언 행위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또,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간음하는 그 여자를 다시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건포도 과자를 좋아하는데도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여라.”(호세 3,1)라고 하십니다. 이미 창녀와 같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이젠 그리스도를 보내어 또 구속하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아내를 사랑하면서 호세아는 어떤 평화를 누릴까요?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며 참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얻은 것은 하느님의 가장 깊은 마음을 엿보는 영적인 통찰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예언자 요나가 자기를 서늘하게 해 줬던 박넝쿨이 말라버렸을 때 니네베 시민들에게 가진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주는 이유는 그것 때문에 악령들이 쫓겨나고 그래서 그들이 평화의 사도로 변하는 나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이름을 자녀로 삼아 하느님 나라의 상속권을 받았다는 사랑받는 느낌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기가 되지 않고 사랑이 외면당해도 상관없는 사랑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합시다. 주님의 평화가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