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8일 (화)
(백)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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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예수님 중심의 삶 “섬김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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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 [forgod] 쪽지 캡슐

2025-01-27 ㅣ No.179606

2025.1.27.연중 제3주간 월요일                                                          

 

히브9,15.24-28 마르3,22-30

 

 

예수님 중심의 삶

“섬김의 자유”

 

 

"옳은 길을 걷는 이에게는,

 하느님 구원을 보여 주리라.

 티없이 걷는 이에게는

 좋은 것 아니 아끼시나이다."(시편50,23ㄴ;84,12ㄴ)

 

친지가 보내준 ‘MBC 사우회보’중 사장과의 인터뷰기사중 말미, “인터뷰를 마치고, 지향하는 리더쉽을 물었다. ‘서번트 리더쉽(Servant Leadership)이란다. 인터뷰 내내 의장석을 비워둔 채 마주한 까닭이 거기 있었다.”는 기사내용을 잊지 못합니다. 종의 서번트(servant)와 섬김의 서비스(service) 같은 어원입니다. 서번트 리더쉽은 섬김의 리더쉽이요, 그대로 복음의 덕목입니다. 오늘 새벽에 읽은 옛 현자의 지혜도 나눕니다.

 

“배워서 남 주는 큰 공부를 해야 한다. 나만을 위한 공부는 내 속에 고여 나를 해친다.”<다산>

“아침부터 부지런히 선한 일을 행하면 순임금의 무리요, 부지런히 이익을 추구하면 도적의 무리이다.”<맹자>

 

결국 예수님 중심의 섬김과 나눔의 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이 궁극으로 가르쳐 주는 바도 예수님 중심의 섬김과 나눔의 삶입니다. 율법학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악의적인 폄훼가 도를 넘었습니다. 예수님의 구마행위에 대해 이들은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또는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주장합니다. 무지에 눈먼 율법학자들입니다. 확증 편향의 편견과 왜곡, 무지의 병이 참 깊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보편적 어둔 모습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론입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사실 내적분열보다 큰 적은 없습니다. 나라나 공동체가 망하는 경우도 밖에서의 침략보다도 안에서의 분열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적일치의 공동체라면 아무리 약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내적분열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공동체도 개인도, 사탄도 속수무책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리하기 이를데 없는 사탄이 자기 동료인 사탄을 쫓아내는 자중지란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은연중 사탄을 쫓아내는 유일한 길은 사탄이 아닌 사탄보다 더 힘 좋은 예수님 당신뿐임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힘센 사탄을 포획하여 쫓아낼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임은 지금까지 무수한 구마사례들이 입증합니다. 악령에 대한 유일한 대책은 성령뿐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유비무환, 사탄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이런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에 따른 섬김과 나눔의 삶뿐이며 당대 제자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답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영원한 죄가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바로 너무나 자명한 예수님의 성령에 따른 구마행위를 목격하고도 더러운 영에 들렸다는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폄훼를 지칭하니 무지의 절정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중심을 벗어났을 때 얼마나 무지하고 악해질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이 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불가사의입니다. 

 

악성 가짜뉴스들의 범람에 악의 오염시대, 악의 보편화 시대요, 악령들린 이들도 날로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상식적이고 정의로운 이가 희귀하게 생각되는 참 괴이한 가치전도의 시대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눈먼 열심의 광신이요 맹신이요 바로 이런 이념이나 사교에 중독된,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이런 무지한 이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무서운 중범죄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말 무지의 광신이나 맹신에는 답이 없습니다. 백약이 무효입니다. 작금의 혼란한 현실을 보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 바로 너무나 자명한 사랑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성령은 예수님 안에, 사람들 안에, 세상 안에 존재하는 선한 모두의 원천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성령을 통해 현존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는 이런 선의 현존을 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바로 그러했고 정상인들이 보기에는 전혀 어렵지 않은 성령의 현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현존에 마음을 닫아버리면 어떻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이 용서하고 싶어도, 접근하고 싶어도 문을 닫아버리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래서 회개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완고히 닫아 버리면 하느님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그의 길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만일 자유롭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의 자유는 반대까지도 선택할 수 있게 합니다. 바로 율법학자들의 선택이 그러했으니, 마음을 닫아버린 잘못된 자유의 선택이 성령모독의 용서받지 못할 결과까지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니 선택의 자유요, 선택의 은총입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에 따른 섬김의 삶을 사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의 은총인지 또 사탄에 대한 최고의 처방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히브리서가 예수님을 선택한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그분은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재산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온갖 죄악의 짐에서, 사탄의 사슬에서 자유롭게 해 주실 분은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뿐이요,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광신과 맹신의 무지의 병, 영혼의 암을 치유하여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자, 하느님의 자녀들아,

 주님의 빛을 따라 걸어들 가자."(이사2,5).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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