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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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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아들이 어렸을 때 아내는 이야기 하곤 했다. “우리 아들 초등학교나 제대로 보낼지 모르겠어.” 중소기업에 다니는 내 월급으로는 살림살이가 늘 쪼들렸다. 부모님께 드리는 돈은 날짜를 넘기지 않았지만 교무금이 밀리고 있었다. 어느날, 아내는 영선이 교육보험을 해약하여 교무금을 내자고 하였다. “영선이는 예비신학생이니 하느님께서 키워주실 것이에요.” 초등학교도 못 가르칠 것 같앗던 아들은 졸업하여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신학생은 되지 못했지만 신학생이 될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신학생의 아버지가 될 지도 모른다. 나는 내 재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돈주의 아닌가.첫월급을 타서 바친 십일조는 부모님 용돈으로 드렸다. 5만원-15만원.부모님께는 생활비였기 때문에 꼬박꼬박 부치는 막내 네를 많이 고마워하셨다. 군포 성요한의 집, 전북 장애인의 집 건립, 청각장애인 성당 건립 같은 곳에 계좌 이체했다. 자발적 가나. 인간의 삶에서 재물이 의미하는 바를 새롭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은 나도 안다. 자발적 가난. 돈으로 살 수 없는 신선한 공기, 침묵과 마음의 평화, 영적 건강, 더 깊은 차원의 사유와 성찰 ... 우리 주변에서 점점 귀해지는 것들을 추구하게끔 가치관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이야기. 무엇이 풍요로움 인지 찬찬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 가난은 굶주리지 않고 많이 공부한 수도자나 지식인들의 몫이다. 배고프고 아픈 가난한 사람에게는 먼 이야기다. 부자들에게는 식사를 얻어 먹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식사 를 주로 대접한다. 빈부 격차의 축소.단체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상장과 휴지 한 꾸러미를 선물로 준다. 담배를 끊은 사람에게는 30만원을 상금으로 준다.어려운 일을 겪거나 응원할 사람에게는 작은 선물을 보낸다. 노점상 둘째 누나를 비롯해 친척도 조금 돕는다. 여러 사람들과 좋은 책과 과일을 나눈다. 눈여겨 본 단체에 계좌이체한다. 가난..... 광주계림국민학교 1학년 입학식 헌 책가방을 메고 갔다. 뒤에 있는 녀석이 내 책가방을 보고 헌 책가방이라고 뭐라고 한다. 난 가난이 내 영혼을 물어뜯는 것을 알았다. 태어나서 부터(1958년) 부터 결혼(1983년), 9년후(1992년)까지 월세집에서 살았다. 난 누가 " 자발적 가난" 어쩌구 하면 화가 난다. "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 가난이란 사람의 영혼을 물어뜯는 것이다. 정부가 사회구조 개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도 필요하지만 개인의 자선이 필요하다. 수도자나 활동가는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 가난을 택했으니 그 말을 쓰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중 많은 것이 경제발전, 동기부여,검소, 근면등에 힘입은 것이다. (파독 간호사및 광부, 중동 건설, 베트남 파병, 수출 역군) 사회 정의가 중요하지만 아들 등록금을 걱정하는 출판사하는 운동권 친구를 보면 답답하다. 책을 쓰거나 출판하는 것이 돈이 안 되면 돈 벌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취미로 하지 왜 평생을 계속하면서 투덜거리는가. 2024년 예수회 문건에 “여로의 마을”의 중요한 근본적인 정신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정신에 근거해, ‘포교가 아니라’ 아이린 지역, 가마가사키에 사는 사람들의 존엄을 지키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활동을 하는 단체의 네트워크.” “포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한국의 기독교(개신교와 가톨릭)는 포교에 더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예수가 초대 교종인 베드로에게 주신 임무(mission)에는 교회를 설립하고 교회의 멤버십(membership)을 늘리라는 것은 없는데 굳이 임무(mission)를 포교, 선교, 전교, 전도로 번역하여 교회를 알리고 신자들을 늘리려고 노력한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심지어 교회의 신자 수를 늘리는 것을 ‘의무’라고 가르친다. 십일조 봉헌은 의무라고 가르치니 신자들이 늘어나면 당연히 교회의 수입은 많아진다. 그러나 예수가 베드로에게 준 임무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양’은 겁이 많고 약한 사람들의 상징이다. 그러니 예수가 제자들에게 맡긴 진정한 임무는 우리 주변에 약자를 돌보는 것이다. 둘째로 “함께 살아가기”는 주일 미사 때 혼다 신부님이 보여주신 그림과 설명에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 그림은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 계시는 장면”의 그림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의 눈으로 보며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서 머물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가난한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강조한다. 이는 청빈 서원 한 수도자에게는 당연하고 신앙인이라면, 아니 신앙인이 아니라도 자원의 한계가 있는 이 지구에서 사는 이라면 청빈하게 살 의무가 있다. 멋진 말씀이다. 세상에는 상급 신자 사제/수도자들이 따라야 할 길이 있고 보통 사람들이 따라야 할 길이 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2,000년간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할 계회인가. 설마 코로나 전처럼 계속 살겠다는 계획은 아니겠지. 멋진 말씀을 독점하고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을 하고 많은 돈을 걷고 건물을 세우고 약간의 자선을 베풀것. 이제 또 다른 멋진 해석을 내놓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조용히 살겠다고 함.멋지다. 우리 본당에서 하는 것은 교우중에서 가난한 사람 셋을 골라 상반기 하반기 개인당 10만원씩 주는 것이다. 신자를 모집하고 교무금을 걷고 생미사 연미사 주일헌금 2차 헌금을 받고 성사를 집행한다. 노숙인이 성당에 들어온다면 누가 그 옆에 앉을 것인가.환영할 것 같은가 내쫒을 것 같은가. 교구장 축복장을 받은 나도 사별후 사제에게서 위로의 말씀 받은 적이 없다. 오직 성사.또는 준성사.어떤 교우는 멀리서 나를 보고 피해서 간다. 무슨 이유일까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과연 그러한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