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 (화)
(녹)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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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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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동 [keedongcho] 쪽지 캡슐

2024-11-22 ㅣ No.104320

첫사랑)

내일 11월 23일은 첫사랑이자 첫아내 김양희 글라라, 그리고 몇년뒤에
같은 날 세상을 떠난 항상 내편 어머니 정순옥 마리아의 기일이다
1978년 12월 1일 성대 무역학과 35명과 덕성여대 응용미술학과
35명은 종로 낙원회관에서 미팅을 하였다.
종강파티를 고고장에서 한 것이다. 종빙고. 아이들이 엄마아빠는 어떻게 만났냐고 하면 나는 말한다 "응, 고고장에서."
춤을 배운 적이 없는 나는 AFKN에서 독학을 하고 중3인 집주인 아들에게서 교습을 받고 장군의 아들 김두한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낙원회관으로 향했다.소지품을 보고 서로 짝을 정하고 신상명세와 취미 등을 물었다.
내 짝은 긴 생머리에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바지를 입은 좀 새침해 보이는 아이였다..처음 밟아보는 무대. 나중에 짝에게 내 춤 실력이 어떠했냐고 물었더니 춤은 별로 였지만 얼굴 표정이
귀엽고 재미있었다나.
신나게 흔들고 중국집으로 가서 자장면과 짬뽕을 시켜서 먹으면서 2:2 미팅을 하였다. 기억이 나는 것.그의 옆에 앉은 여학생의 이름이 " 계선도" 였다는 것. 그래서 내가 "집에서 개를 많이 키우십니까" 하고 좀 썰렁한 말을 했다는 것. 내 옆에 앉은 친구 박 기언이가 잘못해서 짬봉 국물에 손가락이 하나 들어갔는데 내 짝이 다른 것으로 바꾸어달라고 했다는 것.
그 뒤로 계속 만나게 되었다. 토요일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10시간을 무작정 기다리기도 하고 함께 자연농원(지금 에버랜드)에 갔더니 어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본인들은 무서워 못 타겠다고 티켓을 거저 주셨다. 후름라이드라고 물을 뒤집어쓰며 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을 타기도 했다.
학교 신문에 " 나는 김 양희하고 결혼해서 힘줘서 방귀뀌는 이쁜 딸을 낳아서 조아라,잘생기고 착한 아들을 낳아서 조선이라고 하겠다. 조아라 조선 원더플 코리아." 라고 글을 쓰기도 했다.
내가 보낸 성대 신문을 본 그가 만나자고 해서 화를 냈지만 그것이 이별이 되지는 않았다. 거절은 영업의 시작, 협상의 시작이다.
1980년 서울의 봄, 행정 고시 공부 3개월하다가 "이런 시국에
고시 공부만 할 수 없다. 나중에 후회하겠다." 하고 데모에 합류하였다. 무기정학.
군에 가기 전에 그녀를 만나 사정을 이야기 하고 쓰라린 마음으로 이별을 고하였다.“ 나 군대 가.... 잘 지내...이제 안녕이야. 양희야 ”
군에 있는 동안 학교는 제적되었다.군에 온 뒤 편지도 오지 않고
면회오는 사람도 없는 나에게 선임하사가 “ 간첩이냐? 누구든지 면회 오게 편지 좀 써라” 하였다. 그녀에게 편지를 썼더니 답장이 왔다.
마지막으로 도와주고 간 숙제가 A+를 받았다고 했다. "숙제 제목은
"예수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의 비교". 담당 교수님이 극찬을 하셨단다.4대 성인께서 함꼐 우리의 인연을 이어주셨다.
그가 보낸 글
까닭 없이 눈물이 핑 돌 때가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버스 안에서도
친구와 얘기하는 순간 갑자기 생각이 날 때도
차를 마시다가도
책을 보다가도
많은 인파를 바라볼 때와 그 틈 속에서도
하늘을 보다가도
별을 보다가도
달을 보다가도
바람이 불 때도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에도
음악을 들을 때도
테레비를 보다가도
라디오를 듣다가도
식탁 앞에서도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낄 때도
아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마다
연결.1981년 크리스마스 무렵 애인 사진/편지 콘테스트가 있었는데
첫사랑이 자신의 얼굴사진을 넣고 손수 유화로 그린카드를 보내 주어서 1등을 하였다.
그 다음날 내가 쓴 편지이다.
불침번이 근무시간이라고 깨웁니다.
일어나다 말고 미소를 짓습니다.
내 가슴에는 그녀가 짜서 보내준 조끼가 있습니다.
끌어당겨 내음을 맡습니다.
정말 좋은 내음입니다.
익숙한 내음입니다.
한복을 곱게 입은 그녀가 티 없이 웃고 있습니다.
언제 보아도 정다운 모습입니다.
직접 그린 카드도 예쁜 포장지도
그녀처럼 사랑스럽습니다.
글라라 아가씨는 솜씨가 좋습니다.
나는 서울 쪽을 바라봅니다.
어제 저녁 전우들은
저를 부러워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라고.
담담한 한 척 하려 했지만
결국 환한 웃음으로 내 마음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그날, 청평에서 돌아오던 기차 안에서
잠든 나를
그녀가 살며시 안아보았나 봅니다.
어쩜 이렇듯 크기가 꼭 맞는지....
그러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못 입을까봐 걱정이랍니다."
그녀가 내 곁에 있었으면...
살며시 손이라도 잡아주련만....
눈이 내립니다.
내 마음은
서울 하늘.
1983년 제대, 나는 재입학하여 다시 대학 3학년이 되었다.
그녀가 결혼하자고 했다. 나는 졸업후에 하자고 했다.
졸업후에도 전세 얻을 돈이 없을 터이니 그냥 지금 하자고 했다
그래서 결혼하기로 했다.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부모님이 노점상을 했기에 돈이 없었다.
17가구가 사는 월세방에서 부모님과 할머니, 나 넷이 살았다.
하자. 결심이 서면 절벽을 오르는 소처럼 밀어 부치는 사람이다.
행동이 사유나 성찰보다 빠르다.
첫 키스
첫 키스를 언제 하셨습니까.
전 나쁜 사람은 아닌데 독특한 사람입니다.
운동권 애들을 만나서 거침없이 묻지요
" 요새 집사람과 키스는 좀 하나, 기본은 하고 있나 동지들!"
나는 아침에 깨면 우선 칫솔질부터 한다. 준비된 키스인.
첫 입맞춤은 결혼을 앞둔 시기에 방배동 서문여고와 방주교회 근처의 작은 골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술을 배운 적이 없어 이가 좀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달콤했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골목만 보면 들어갔습니다. 수도 없이.
대학3학년때 방배동 성당에서 관면 혼배를 했다. 주임사제는 김운회 루카 신부님(원주교구 주교가 되셨다) .제주도로 신혼여행 갔다 오면서 파인애풀 한 개를 사서 인사를 갔더니 좋아하셨다.
인연은 운명이 되었다. 언젠가 왜 나와 결혼했냐고 했더니

" 내 옆에 다른 사람이이 있는 걸 상상 할 수 없어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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