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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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성심대축일 다음 날)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 루카 2, 41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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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승 [bona24] 쪽지 캡슐

2024-06-07 ㅣ No.173100

“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 2,48~51)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자신들의 과거를 바라보게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를 잊어버리기에 자녀들의 성장 과정에서 자녀들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자녀들이 일정한 나이(=사춘기)가 되면 ‘자의식’이 생겨나면서부터 부모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부모는 막무가내로 부모의 말에, 말대꾸한다, 고 야단을 칩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부모에 대한 불순종이나 말대꾸가 아니라 어엿한 한 사람으로 깨어나는 과정에서 단지 걸러 지지 않은 채(=이성적인 사고가 정립되지 않음)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곧 엄마의 모태에서 일차적으로 육신적 탯줄을 끊고 태어난 자녀가, 이제 성장해서 이차적인 심리적 탯줄을 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장의 아픔이 동반하는 민감한 시기입니다. 이미 경험한 부모들이기에 따뜻하게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면서 성장통을 함께 나누기(=친구가 되어주기와 대화하기)보다는 야단이나 핀잔만 한다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과 사이에 간격과 간극 만을 넓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성장에 따른 부모와 자녀 사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년 예수의 언행은 이제 어엿한 한 사람으로서 가족들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물론 겉으론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그림의 내면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젠 예수는 더 이상의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는 성모님의 표현에는 아직도 자기 아들이 어엿한 한 사람이라기보단 어린아이로 자신들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사고 의식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반문은 어머니의 의도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기보다 분리의 선언이고 성인이 되었음을 통보하는 것이고 선언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라는 말의 이면에는 “당신들이 제게 삶의 본으로 보여 주었고 이제 때가 되어 저 역시도 제가 있어야 할 곳에 머물고자 하는데, 아직도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까.”라는 응답이라고 봅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고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의 어머니에게 반문과 함께 그 진정한 해답을 넘기신 것입니다. 이는 곧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라는 표현’처럼 예수님은 이제 부모님으로부터 가르침 받았던 신앙 교육을 이해했고, 그 깨달은 바를 때가 돼서 실행한 것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이 말은 예수님께서 12살 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을 들으신 어머니 마리아도 내심 놀라고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벌써 내 아들이 이렇게 어른이 다 되었나. 더 이상 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다, 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따른 당황스러움! 예상하셨겠지만 너무 빨리 그때가 온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 이것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식이 부모의 품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분리의 아픔입니다. 홀로서기의 순간입니다. 이젠 예수님은 더 이상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자식은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때가 되면 자식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불린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부모 곁을 떠나야 합니다. 자식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하며, 이런 점에서 참된 부모의 역할을 본으로 보여 주신 분들이 바로 아브라함과 성모님이십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모범처럼 자식의 말을 따지지도 말고 추궁하지도 말고 단지 이 모든 일을 묵묵히 마음에 간직하여 그때를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신 성모님과 요셉처럼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들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는 순례의 길에 있습니다. 그 길에서 자녀들을 잃고 방황할 때, 그리고 자녀들을 다시 찾을 때, 자녀들이 우선 하느님의 뜻인 참된 자신이 되어가고,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정향定向할 수 있도록 함께 머물러 주고, 함께 아파하면서 그때가 될 때까지 늘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기다려 주어야 하리라 봅니다. 분리의 아픔이 곧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때부터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침묵 가운데 아들 예수와 동행하면서 어머니인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도록 기도하고 마침내 십자가 밑에 서 계신 그 순간이 바로 성심이었습니다. 

제가 좋아서 사제가 되었지만, 제 어머니는 저로 인해 사제의 어머니로 말 못할 어려움과 힘듦을 기꺼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끌어안고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 평생 대못을 박아드렸음은 미안하고 또 감사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저보다 더 참된 사제라고 믿습니다. 모든 사제와 수도자의 어머니는 다 사제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실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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