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8일 (월)
(녹)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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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성당생활이 질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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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61.106.80.*]

2008-07-23 ㅣ No.6932

 
 
   예수님은 게으름, 교만, 불안감과 타협하신 분이 아닙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자들을 위해 모든걸 내어준 분이지요.
   천주교 생활이 질리도록 유혹하는 존재는 악의 존재입니다.
   하늘의 루치펠(추후 사탄이 됨)은 가브리엘(하느님의 권세), 라파엘(하느님의 치유), 미카엘(무엇이 하느님의 일인
   가?)보다도 더 쎈 빛의 천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질투와 시기심에 속아 하느님께 단죄받아 땅으로
   떨어집니다. 쉽게 말씀드려 지금은 박탈당한 하늘나라 상임위원직을 남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겠다며 교회 공동체와 세상 속 타인의 시기, 질투등을 본다는 것은 우리 스스
   로가 얼마나 바보과인지를 잘 말해주는 것들입니다. 천주교는 예수님 탄생과 동시에 2008년동안 이어진 전례를
   간직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내재된 주님의 은총을 보지 못하고 단편적인 외적 요소들에 연연해야 함은
   슬픈 형국입니다. 희망의 햇볕, 기도의 물, 그리고 사람들과의 인내라는 거름, 이것은 왜 농부들에게도 자연속의
   인분이 가장 커다란 거름 효과가 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기도없이 교회, 절, 성당을 가는 사람들은 단지 소풍에 불과하기에 곧 지쳐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 두다리 쭉뻗고
   쉬어야 하는 마음이 절로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풍을 간다하지만 절터를 향하는 길목의 모텔, 산속의 휴지등
   을 방관하거나 방치하고 오기 쉽상입니다. 성당에서도 주보나 그 무엇을 흘리고 다니는 경우도 쉽게 발견될 것입니
   다. 그러나 기도를 즐겨 바치는 사람은 성부와 성모님의 품이 얼마나 넓고 높고 깊은지를 절감할 것이며 더 나아가
   세상속의 모든 고통을 피하여 성경을 읽을 때도, 삼종기도를 바칠 때에도 비로소 자기에게 바치던 그것의 졸업시
   기를 맞아 옆자리의 딸이나 아들의 가슴에 몰래 사랑을 심어주기도 할 것입니다.
 
   님이 꿈을 꾼것은 현실에서부터 그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님이나 목사님들이야 당연히 자신의 종파로 오는 것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부님들은 조금 다르심을
   느낄 수 있을것입니다. 사실 스님들도 천주교 신부님들의 그것과 조금 유사하신데 그것은 자연과 계시의 호흡성
   으로의 연관이 있겠습니다.
 
   우리는 자주 타인에게 엄정하고 자신에게 관대한 잘못된 신앙생활로 빠지기 쉽상입니다.
   하여 꿈에 만난 스님과의 대화를 우리 스스로의 묵상의 관점으로 해석해봅시다.
 
   자연속에서의 백팔번뇌를 떠나 곡차와 함께 물처럼 바람처럼 산야의 정기와 친교하는 스님이 묻습니다.
   왜 천주교(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학교)이신가요?
   불가인들도 개신교인들도 천주교인들도 모든 복음의 정신인 삶과 죽음 가운데
   천주교내에는 가계치유라는 업을 인정하지 않치만 그것이 잘못 침투되어 있긴 한데,
   혹시 그런 탯줄과 관련된 삶을 살고 계신가요?
 
   네에, 저는 목걸이처럼 그것을 걸고 태어났답니다.
   그러자 스님은 그렇다면 부처님 앞에 천배를 드려 풀어야 합니다. 이것은 가톨릭 수도자들이 자신을 고생시키며 
   모든 분심을 없애는 편태와도 같은 행위로서 차차 그것을 감수할 수 있겠는지는 묻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소녀는 대답합니다. 저는 엄마가 천주교인이라 그 뱃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도시에는 제가 편하게
   갈만한 곳이 눈에 잘 뜨이지 않습니다. 이에 스님은 속으로 한숨지으며 알았다 하고는 연락을 준다합니다.
   그리고 스님은 염불을 합니다. 염불중에는 지난 크리스마스때 10만원짜리 수표를 앞집 성모원에 선물로 줬는데
   돌아오는 내년 사월 초파일에는 동자승시절 오재미를 했던것처럼 그분들이 10만원짜리 수표를 다시 건내줄 것
   에 대한 흐믓함등을 섞다가 염불로 지우다가 그럽니다.
 
   그래서 마음이 여리거나 성질(성격과 기질)이 적극파인 가톨릭(보편성) 신자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나 개신교로
   가는데 우리 불가에도 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기도 합니다. 그런데 천주교에는 개신교와 불가인들중 골수파들이
   개종을 하는 것을 묵상해 보기도 합니다.
 
   불가는 자연속에서 나물캐고 밥먹기에 신도들의 보시가 많이 필요한 관계로 이중의 6만을 가져오면 좋겠다 합니
   다. 천주교야 천원을 주일에 내는 교회이니 역시 알아서들 잘 낼 수 있도록 목탁을 두드려줍니다.
 
   소녀는 잠에서 께어났습니다.
   그리고 천상교회와 연옥교회, 지상교회를 불가와 어깨동무로 믿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기를 희망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수도자의 고백처럼 선교의 일생을 마친 뒤, 아! 허무하고 허무한 나의 사람이로구나!의 성찰에 있어
   그것에 대한 걸림돌과 디딤돌 사이에서 또다른 여행을 준비하기도 합니다.
 
   에고! 도솔천(가톨릭의 천국과 비슷한 뜻)아! 하면서 신앙생활도 귀찮아! 하면서 우리집 아이들처럼 공격적인 기도
   단거리 선수처럼 빠르게 그리고 친구들과 다시 놀 궁리 끝에 그리스도의 제단을 잊고는 부처님 손바닥에서의
   손오공이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손바닥은 사랑이 담긴 움직이는 침묵의 말씀되어 어느날에는
   그 모든 분심을 내가 아닌 성모님의 도움으로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찰싹! 때려준 후 훅!~ 불어버리기도 합니다.
 
   미사는 집에서 성수를 바르고 주님의 제단에 그것을 의탁하는, 성당을 향하는 첫걸음부터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 속에서의 고통과 환희를 경험함으로써 절대 버리지 않는 친구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께
   귀의함으로써 지금은 섞임의 은총으로 의무감이나 해치움으로 성경을 필사할 수 있지만, 저녁의 일기 또한
   그렇게 해치우는 습성으로 후닥닥 써 내려갈 수 있지만 오늘 저녁, 내가 주님과 함께 밀회속에서의 그것을 반성
   할 수 있다면 내일은 좀 더 온유하고 선명한 성경의 글자들로서 체팅할 수 있을것입니다.
 
   예를 들어 2008년의 신약백성으로서의 전례를 지향하고 있는 가톨릭의 7성사를 비유로서 묵상해봅시다.
   1. 입문성사 : 세례, 견진, 성체성사
   2. 봉사성사 : 혼인, 성품성사
   3. 치유성사 : 고해, 병자성사
 
   이 성사의 은총을 기억하며 생활속의 준성사로서 나는 과연 무엇을 했나요? 주님, 하면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내 영혼의 문을 두드려 당신의 집에서 곱게 세수하고 이웃을 만나게 해 주시니
   이웃과 함께 즐겨 담소하고 서로를 격려할 수 있도록 해 주셨고
   또한 감사한 마음으로 영육의 양식을 나누도록 허락하셨나이다.
 
   사랑하는 당신과의 혼인의 추억을 떠 올려
   오늘 밤에는 비구니(수녀)되어 비구승(신부님)으로 오시는 당신과 함께 대처승(목사/결혼한 승려)의 마음으로
   당신께서 허락하시는 사제직, 왕직, 예언직의 세례성사의 은총을 내가 받을 필요없는, 단 한번 죽으시고 묻히시어
   부활하신 성령의 힘으로 이웃에게 전파하게 하여주소서. 이제는 나를 위한 기도보다 이웃과 나누려는 당신의
   탯줄 은사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로써 저의 수많은 오류와 악행들을 용서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 드리오며
   제가 일상안에서 더욱 즐겨 1.성찰하고 2. 참회하며 3. 정개(죄를 반복치 않겠다는 결심)로서 다짐에 다짐을 더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저 또한 당신의 끈을 놓을 수 없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저의 일방적인 고백으로서
   당신의 용서를 강요한 땡깡의 결과이오나 더욱 성숙한 여인이 되어 당신과 함께 즐겨 데이트로서 오늘은 고백이
   아닌 고해의 용기로서 나아가 성사의 기쁨이 되게 인도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바라시는 행복의 꽃을 피워바치는 어여쁜 소녀의 마음으로 마지막 순간의 십자가의 오른편에
   달린 저 강도의 고백처럼 악이 침탈하려는 우리 미약한 도구들로 하여금 곡해의 소지가 있는 종부성사라는 말씀을
   병자성사로 바꿔주셨듯이 저희도 당신의 고통을 위로하는 병자성사로서의 노자(초대 순교자들이 주님께 노잣돈을
   받듯 이루었다는 성사 명칭에서 유래)성사를 이루게 하소서. 우리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추신) 죄송합니다. 원래 기도문은 이렇게 사적으로 공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교계의 공식 인준으로서 공적
   교리 즉 믿을교리로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공간은 신앙상담란의 자리로서 성령께 의탁하는 마음과 그
   섞임의 은층과 더불어 작성되었으니 양찰하여 주시고 행복한 하루를 이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海棠 河京鎬 Domi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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