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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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예수님의 수난과 고난중 몇가지 의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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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21.159.63.*]

2010-12-15 ㅣ No.9243

부족한 글이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해서 씁니다. 더 훌륭하신 분의 답변글이 올라올 것이라 믿습니다.
 
첫번째 질문: 예수님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나
 
물론 알고 계셨습니다.
복음서 곳곳에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었다가 사흘만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17,22-23; 마르9,30-32;루카9,43-45)
 
예수님은 게쎄마니의 기도때에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요한 14, 36) 라고 하시며,
아버지의 뜻인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순명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 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 34) 라고 하셨듯이,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셨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천지창조이전부터 당신의 외아들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 16)
 
두번째 질문: 그당시 유대교 성직자라 불리는 바리새인들이 왜 구세주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는가?

그 당시 예수님의 많은 행동과 말씀은 일반 백성에게 보다는 유다인들의 지도층인 종교지도자들에게 반대받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지도층인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율법학자, 사제들의 대부분의 눈에는 예수님이 하느님처럼 행동하는 신성모독자로 보였고,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쳐주는 율법을 어긴죄, 당신 자신이 성전이시다라는 성전모독죄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인간의 죄를 용서할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들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일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반역자로 고발하여 사형에 처하라고 로마인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뜻이고, 하느님의 깊은 뜻은 따로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이전부터 인간 구원을 계획하셨으며,
이 계획은 구약에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어 십자가의 고통을 겪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밝히 드러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죄의 결과로 죽을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위하여 당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시어 희생제물로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기에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완성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 책임을 전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물을수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몰랐기에 저지른 일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안다고 고백하기에 가장 중대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내안에 감추어져 있는 죄가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생각해 볼때, 내 안에 항상 도사리고 있는 나의 악습과 잘못된 행위들이 지금 이 순간도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당신이 악습과 죄를 즐김으로써 마귀들과 함께 주님을 못박았으며 지금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아씨씨의 성 프란치스코)

세번째 질문:

예수님꼐서 돌아가시기전에 하신말씀중에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말씀의 깊은뜻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뜻에 갈등을 느끼셨을 정도로 인간적이셨기에, 따라서 예수님십자가 죽음은 인간적으로 볼때 완전한 패배요 실패의 상징처럼 보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참 승리의 순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하느님의 뜻앞에 도망치고 싶은 끊임없는 유혹을 물리치고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매달리심으로써 자신과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신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절규중에 그 보다 더 할수 없는 절규인 '하느님께 버림받았다' 는 것마져도 당신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로써 그리고 죄 많은 인간의 자리에 선 참 인간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는 죄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밑의 글은 묵상방 전삼용 요셉신부님의 글입니다)

성토요일 밤은 예수님께서 저승에 가시어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성 바실리오 성인에 의하면 이 때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고 아들은 생명이 없는 죽은 이들의 세계에 계시고 두 분을 이어주어야 할 사랑의 성령님은 두 분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 채 눈물 흘리고 계시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로 사랑이 되시는 분이신데 아버지는 아들을 죄인처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쓴 이상 사랑할 대상이 아닌 벌을 주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랑대신 아들에게 십자가의 고통을 선사합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사랑해 본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압니다. 사랑하면 함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혼인하여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배신을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홀로 남은 사람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는 이 고통을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느님께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은 죄 자체보다도 그 죄로 인하여 사랑하는 인간이 당신을 등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쩌면 온전한 사랑을 잘 모르기에 덜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잃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할 고통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사랑하는 분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한 번 이상은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 고통을 당신 아들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들만 괴로웠을까요? 아버지도 아들과 이별함으로써 같은 고통을 당하십니다. 아버지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신께 드렸는지 인간이 좀 느끼고 죄로부터 돌아와 다시 당신을 사랑해 줄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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