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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죽음의 잠을 부르는 뉴에이지 음악(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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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4.10.164.*]

2011-01-08 ㅣ No.9297


낮은울타리 문화가이드

[기획특집] New Age의 정체를 벗긴다(5)                        

 

죽음의 잠을 부르는 뉴에이지 음악

 

 


■ 역사적 배경

뉴 에이지 음악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이 음악의 근간이 되는 ‘새시대 운동(뉴 에이지 운동 New Age Movement)’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다만 뉴에이지라고 알려져 있는 이 무브먼트는 1875년 뉴욕에서 러시아 여인,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차키에 의하여 창설된 신지학 협회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이 협회의 3대 회장인 영국 출신의 여자 알리스 베일리에 의해 실질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1975년까지 비밀지령에 의해 완전히 지하에 숨어 있었으나 1975년부터는 전 세계적으로 사용가능한 모든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새로운 시대‘이론을 공개 선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든 종교는 그들 사이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기본명제를 내세우며 전 세계의 사회 모든 분야에 은밀한 방법으로 침투해 들어와 [‘예수님 없이’]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되어] [이 땅 위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자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이들의 전략은 사탄이 인간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고차원적 전술전략으로서,

 

첫 단계 전술로는 평화운동, 반전운동, 구축운동 등을 통하여 많은 동조자 계층을 확보하고,

둘째 단계로는 개인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는 종교들에 대한 회의적이고 파괴적인 비판을 전개하여, 내세에의 소망보다는 현세에의 행복에만 집착하여 결국에는 신의 존재(특히 그리스도교의 신)를 무시하거나 또는 부인케 만든다.

 

 

 이 운동조직의 프로그램들은 겉으로 건강한 생활에 관한 주제를 자주 다루면서, 대체로 동양의 심령기술을 변형한 명상, 마인트 콘트롤, 자기 암시, 요가, 최면술, 초능력 요법, 이완요법 그리고 소위 적극적 사로 등의 도입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적극적 사고’는 자주 성경귀절과 연결되어 ‘신앙’, ‘믿음’이라고 혼돈되게 불리워 왔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 특유의 명상을 돕기 위해 음악을 사용하여 왔는데,

‘음악요법’에 사용되는 음악들을 이른바 ‘뉴 에이지 음악’이라고 우리가 부르고 있는 것이다.

 

 

 

 뉴 에이지 음악은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문명에 대한 도전과 반동으로 태동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동양적인 신비사상을 주요소로 하여 명상을 돕기 위한 음악기법을 사용한 것인데, 특히 80년대에 들어서 록, 헤비메탈 등 시끄러운 음악에 염증을 낸 이른바 철학적 사고를 가진 엘리트층에서 세미 클래식의 한 장르라는 인식으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60년대 후반에 몰아친 경제불안과 정치혼란으로 인해 사회 전반 역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음악은 히피문화를 기반으로 포크뮤직, 사이키테릭, 하드-록, 프로그레시브 등 많은 장르의 음악을 양산시켰고 음악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이러한 음악들은 현실도피와 사회 비판적인 내용의 가사, 환각적인 사운드 등을 표현하였고 전반적으로 전자악기를 사용, 인공적이고 여기저기를 꾸민 듯한 사운드를 구사하였다.

이러한 음악들은 70년대, 80년대를 넘어오면서 고출력의 사운드를 구사하며 감각적이고 아무 의미없는 일회용적인 사랑노래나 불러내는 음악답지 않은 음악, 포장에 둘어싸여 상품화된 듯한 음악들로 산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인간성의 회복, 순수한 자연으로의 복귀를 소리없이 부르짖으며 태동하기 시작한 음악이 ‘뉴에이지 음악’이다.

 

 ■ 뉴에이지 음악의 출발, 생성 분류

 

팝 역사상 뉴 에이지 뮤직이 음악이라는 강물의 흐름 속에 등장한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신세대’라는 말이 우리들의 귀에 익은 까닭은 뉴 에이지 음악의 발전상이 남다르게 빠르고 그만큼 발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뉴 에이지는 재즈, 클래식, 일렉트릭 뮤직, 프로그레시브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을 통합하여, 아티스트의 개성과 취양에 맞는 것을 뽑아 쓰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까닭은, 다른 장르의 음악이 악기나 구조, 음악의 형식 등 겉둘레에 치중하는 반면, 뉴에이지는 인간의 내면 세계, 순수한 정서적인 효과와 치유 등에 신경을 쓰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뉴 에이지는 주로 순수 어쿠스틱 악기에 치중하였으나, 80년대 중반을 넘어 오면서 부터는 일렉트릭적인 요소를 가미한 음악도 나오기 시작했다.

또 초기엔 탐미적이고 신비스러운 풍을 노래한데 비하여 점차 현대인의 감성에 밀접해지는 세련되고 지연의 순수함을 노래하는 것이 많아졌다고 볼 수 있겠다.

 

 

 

 

 

현대 타음악이 십대를 중심으로 음악을 발표하는데 반해 뉴에이지는 십대부터 장년층까지 골고루 느낄 수 있는 음악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다. 그 영향력이 대단한 만큼 그 위험성도 크다.

 

 

 

 

 

 

뉴 에이지 음악의 출발과 그 생성은 크게 두 가지 줄기로 분류된다.

 

 

 

 

1. 기능적 출발: 단순히 음악적 관점에서 음악의 한 장르로서만 취급하고자 하는 관점이다. 이는 음악인들이 자신의 음악세계를 새롭게 열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 자연히 동양의 신비적, 전위적, 즉흥적 음악에 매료되어 융합 일치를 시도하여, 동양적인 신비감과 정적인 분위기를 신서사이저와 같은 최첨단의 현대 전자악기를 이용해 동서양의 교감을 실현코자 노력하는 것이다.

 

 

2. 영적 출발: 출발부터 뉴 에이지 운동이라는 반그리스도교 사상을 갖고 의도적으로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탄의 음모라고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어떠한 동기와 양상으로 출발하였건 간에 결과적으로 그 끝은 하느님을 부인하는데 이르게 되므로, 모두 경계하여야 한다.

 

 

■ 기준은 무엇이며 한계는?

 

일단 뉴 에이지 음악을 단순히 음악의 한 장르로서 취급코자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이며 그 한계는 어디까지로 할 것이냐 하는 것을 정의내리기는 마치 우리 사회 전반에 문화라는 이름으로 침투해 들어와 있는 ‘뉴 에이지 정신(?)’의 흔적들을 전자 현미경으로 구별해 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떤 의미나 형태로든지 이미 제도화되고 규범화된 고정관념의 틀에서 탈피하려하고, 이에 따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전통적 질서를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뉴 에이지 음악 역시 어떤 눈에 보이는 규범이나 특별한 기준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딱히 한 마디로 정의하여 말하기는 실로 어려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뉴 에이지 음악의 전문 레코드사라고 알려져 있는 Narada, CBS 등에서 출발되고 있는 앨범들을 들어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이 역시 어떤 특별한 분류기준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아티스트들의 음악성과 그 음악적 기호나 성향에 있어 그렇게 표현하게 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1972년 CBS에서 제작된 바 있는 ‘Pioneers of New-Age’(10 Artists who opened up New dimensions in music)는 제목 그대로 ‘뉴 에이지(음악)의 선구자들’이기 보다는, 괄호 안에서의 설명처럼

‘음악에 있어서 새로운 차원을 연…’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말로 그들이 어떤 특정한 관념(뉴에이지)을 갖고 출발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다만 후세의 음악 평론가들이 굳이 뉴 에이지 음악의 어떤 대표적인 것들을 들라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성향과 느낌의 음악들을 들어 말하지 않겠느냐고 애써 뉴 에이지라는 이름을 붙여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서이다.

 

 

 

 특별히 우리가 분류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엘리베이터 뮤직 그것이다. 말 그대로 현대식 고층 건물의 엘리베티어에 탔을 때 그 안에서 들려오는 아주 감미로운 음악을 듣게 되는데,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상의 의도없이 그저 귀를 간지럽게 긁어줄 뿐인 것으로서 잠시 그 짧은 동안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역할로서의 음악을 지칭하는 것이다.

 

 

 무드 음악, 또는 환경 음악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무공해 음악 이라고까지 불리우는 이 음악은런던의 트리니티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멜라크리노가 제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때 육군에 입대, 정훈국 소속으로 장병들의 위문공연 활동을 하다가 나중에는 심리전 담당 부대로 배속되어 음악을 이용하여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심리전용의 음악]을 개발하므로서 태동된 것으로서, 온몸의 긴장을 풀게 하고 마음 편하게 듣는 음악이라고 해서 통칭하여 ‘이지 리스닝 뮤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28인조 현악기 그룹의 ‘만토바니 오케스트라’가 이에 속하며, 최근에 이르러서는 Sweet People의 ‘The bitds of Paradise’ 등의 음악을 들 수 있겠는데, 이것들은 어떤 음악적 해악성을 논하기보다 그것들 자체의 감미로움과 편안함이 가져다주는 음악요소가 결국

 

우리들로부터 십자가를 멀리 하도록 하는

 

[뉴 에이지들의 ‘이완요법’에 걸려드는 초기 단계]에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을 ‘뷰티풀 뮤직’이라고도 하며, 음악이 흐른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음악 환경 속에 젖어 있도록 하게 하는 특징이 [이 음악의 목표]이며, 흔히 우리가 엘리베이터나 슈퍼마켓, 백화점 등에서 듣게 되는 음악이다.

 

위와 같은 일반적 감미로운 음악들과 뉴 에이지 음악을 애써 구별하게 되는 기준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성으로서 밖에 스스로 판단할 그 이상의 어떤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같은 감미로운 음악일지라도, 뉴 에이지 음악은 기본적으로 뉴 에이지 사상을 주입코자 하는 시도가 (연주자가 의식적이던 또는 무의식적이던 간에) 우리의 영적인 면을 건드리게 되어, 늘상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의 귀에는 쉽게 판별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December’의 George winston은 원래 히피 명상가였었는데, 히피들의 명상 방법은 동양의 신비적 또는 주술적 요소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실상 그의 음악은 [대단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비록 그가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로 우리의 주님인 “Jesus, Jesus, Jesus”를 노래한다고 해도 말이다.

 

자신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것이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주-여, 주-여”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마7:21)

 

 

 David Lanz는 “음악을 이용해 자신의 철학과 영적인 감흥을 청중과 함께 나누기 원한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음악 안에 어떤 영적인 요소가 담겨있음을 은연중에 시사하였다.

 

 

 

 

 ■ 국내에서의 활동

 

지난 89년 4월5일 대학로의 ‘인켈 스튜디오’에서 음악 동호회인 훼이머스(Famous) 주최로 ‘뉴 에이지 음악 감상회’가 열린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아무 별다른 활동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으며, 다만 국외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뉴 에이지 음악들이 이젠 제법 큰 레코드상의 한 구석에 의젓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뉴 에이지 운동의 사상 자체가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것이기에 뉴 에이지 음악도 아직은 다분히 서양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며, 동양에서는 이웃 나라인 일본이 오히려 미국을 앞지를 정도로 뉴 에이지 음악이 심도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데, 이는 일본이 우상숭배가 극심하여 영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있고, 뿐만 아니라 경제적 대국으로서의 급진적 비약에 따른 허무주의의 결과가 그들로 하여금 동양적 바탕 위에 쉽게 그것들을 수용하게 된 연유라고 본다.

 

국내에서 뉴 에이지 음악 성향의 아티스트를 말한다면 ‘비단길’의 황병기를 꼽을 수 있을 것이나, 그가 스스로 뉴 에이저라고 말한 바도 없고 또 자신의 음악을 그렇게 평한 것도 아니기에 함부로 말할 수는 없으나, 다만 그와 같은 음악 성향을 우리 한국적 상황에서 접목시켜 관찰할 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최근 국내 가수들 중에서도 몇몇 젊은 가수들이 뉴 에이지 음악을 흉내(?)낸 적은 있으나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최근 C.M 작곡가 김도향이 만들어 낸 ‘태교 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수준급(?)의 뉴 에이지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예전 한 때 국내 뉴 에이지 음악계의 선두주자로 알려져 있는 송명관 씨는 잘못 와전된 것으로 다만 그의 음악성향(음색)이 그럴 뿐인 것이지 우리가 말하고 있는 부정적 개념으로서의 뉴 에이저는 아니다.

그는 지금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열심히 복음증거에 힘쓰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 성서적 비판

* 힌두교, 불교 등과 같은 동양철학에 서구인들이 심취되면서 힌두교의 명상, 불교의 윤회설 등 동양종교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

* 주로 명상음악이나 동양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춤에 사용되는 이 음악은 자신을 계속 비워가면서 마지막 단계에서는 결국 하느님의 존재마저도 부정하게 된다. 즉 인간도 신적 존재이며, 모든 행동의 판단 기준을 인간으로 여겨, 인간의 자아만이 가장 선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탄의 계략이다. -철저한 인본주의의 뿌리이다.

 

*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준비하는 뉴 에이지운동의 한 갈래로서, 결국 음악을 통하여 인간의 영을 혼탁케하려는 것이다.

(예) 미국의 일부 공립학교에서 수업 중 어린 학생들을 뉘워놓고 이 음악을 사용하여 명상, 최면을 유도하기도 한다.

 

 

■ 우리의 대응 및 자세

1.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서의 삶.(로마12:1-2)

2.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을 지키는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서의 삶.(고린후11:1-4)

3. 하느님의 문화명령(창세1:27-28)에 따른 올바른 그리스도교 문화관의 정립.

당장 듣기에 좋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음악을 계속 대한다면 사탄의 음흉한 계략에 말려들어가 영적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이 높다고 본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되새기며 삶의 모든 방향을 신부처럼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문화명령에 따른 올바른 대안을 만들어갈 좋은 군사들이 많이 일어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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