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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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신앙인은 신앙인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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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6-10 ㅣ No.173170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3-12).”

 

 

 

1) 이 말씀에서 ‘행복’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하고 참된 복’을 뜻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라는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부자’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가난함’은,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마음의 가난함을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난’은 행복의 원인이나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극복해야 할 ‘악’이고 불행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은, “물질적으로 가난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만 충실하게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고, 그곳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위로’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가 바로 연상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19-21).”

 

<실제 상황이라면, 라자로는 정말로 슬프고

 

서럽고 비참했을 것입니다.

 

만일에 라자로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이었다면,

 

그 슬픔과 서러움은 원한이 되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고 저주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 속의 라자로는 하느님을 충실하게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고 서러워해도

 

증오와 원한을 품지 않고, 부자가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부자가 저승에서 어떤 처지가 되었는가?”보다는

 

라자로가 하늘나라에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마도 그 위로는 생전의 서러움을 모두 잊게 만들 정도로

 

크고 참되고 영원한 위로일 것입니다.>

 

 

 

3) ‘온유한 사람들’은 산상설교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8-39).”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더 크고 더 잔인한 폭력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비폭력이 폭력을 이깁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하느님 뜻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마태 7,21).

 

‘자비로운 사람들’은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이 말씀들에서 ‘어린이’는 나이가 어린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마음이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6월 8일에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냈는데,

 

전례력에서 그 기념일의 정식 명칭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은 ‘마음의 깨끗함’에서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신앙인은, 주님의 평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고,

 

자기가 누리고 있는 그 평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사람이고, 이 세상을 주님의 평화만 있는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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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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