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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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억 신부님_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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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6-10 ㅣ No.173169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하나가 채워지면 또 하나가 채워지길 원하여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서 헤매게 됩니다. 참된 행복은 천상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이 곧 행복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그리하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과연 어느 사람으로 행복한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의 가난은 ‘주고 또 주고 더 주고 싶은데 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슬퍼한다는 것은 ‘공명’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어떠한 처지나 환경, 여건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친절과 너그러움으로 나타납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공정입니다. 그러나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정의를 포용합니다. 그래서 의로움은 사랑에서 나온 의로움이어야 합니다. 자비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몽땅을 내어주는 베푸는 사랑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함, 완전함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쳐야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안전함에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함에서 오는 내면의 평화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한 사람은 목숨을 바치면서도 하늘의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박해나 모욕도 달게 받으면서 그 자체가 하느님을 증언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사도들은 최고 의회에 끌려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하여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이 세상에서의 막연한 기대를 접을 수 있고 이 세상에서의 고달픔과 시련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곡식 단 들고 올 때 춤추며 노래하리라” 했던 말씀이 나에게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지금 내 안에 모시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내 안에 모시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모시고도 두 마음을 품게 되면 참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행복을 어디서 찾습니까? 세상의 풍요 안에서 찾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결국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차지한 사람은 비록 지금 세상의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차지해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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