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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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 : 대죄 중에도 기도의 의미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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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59.86.231.*]

2007-06-21 ㅣ No.5513

 

   "신앙(생활)은 정신과인 이성도 육체과인 감성도 그 계단이 때때로 놓여지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정신과

   육체가 하나된 의지로서의 성모님 손잡고 성부께 나아가는 여정이 이상적인 모델일 것입니다.

   감성적이서는 안된다라는 사고는 자칫 자신을 마지막 적인 고독이라는 올무에 가두는 것으로서

   요즘 우리의 죄로 인하여 증가 추세인 자살 행위등의 스스로 구원을 차단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1. 따라서 대죄중에 있는 사람도 유다 또한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께로부터 성체를 영하였으나 그것을

      방해하러 사탄이 그의 몸 안으로 들어 갔기에 우리가 다만 하느님을 흠숭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로서 무장하고 대처해 나갈 때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주님 대전에 무릅끓고 용서 청할 때 화해의 은사인 성사생활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요.

 

   2. 당연히 은총 또한 받을 수 없는것이 아닌, 세상 만민의 바램데로 누구나 하느님의 복(은총)을 구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 모두의 바램데로 천국으로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3. 모든 기도는 의미(하느님께 봉헌 되어 지지 않음)가 없지 않는다는 규정심리 역시 불안정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느님을 사랑하기가 어떤지요? 또한 지옥으로 떨어진 영혼을 위한 마음은 어떻겠는지요?

      그리고 그 가운데의 연옥에서 정화 받는 영혼 사랑에 대해선 우리가 어떠한지요?

 

      이것은 천사도 모르고 하늘도 모르고 다만 아버지께서 아십니다. 기도를 조건없이 하고 싶으면

      나를 세상에 파견하신 분보다 내가 높지 않음을 깨닫고, 또한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음을 인정하면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 어린아이처럼, 아니 영원앞에 찰나라는 지상을 살고 있는 어린아이의 마음에

      감사드리며 하느님을 그리워하면 좋을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없으며 그저 나를 주님 대전에 의탁 하도록

      조금만 더 노력을 기울이면 될 것입니다.

 

  4. 은총생활의 속편은 성사생활입니다. 기도생활도 봉사생활도 공동체생활도 공부생활도 성사생활인지

     아니면 성사생활이 이 네가지 생활인지 모를 때가 행복 하기도 하겠으나 성사와 준성사 역시 호흡처럼

     친밀 해지고 싶다면 우리가 그것을 향해 걸을 때도, 뛸 때도 호흡을 잘 관리하면 될 것입니다.

     미사는 세상에서 가장 친숙하신 은인으로서 가장 고통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 고통의 전날밤, 천하 만민을

     위하여 올리신 제사이므로 완전한 기도입니다.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5. 미사때의 영성체의 부담을 주는 정체감은 과연 무엇일까요? 천사일까요? 악마일까요? 아니면 미지근한

     나 자신일까요? 미사 참례를 기피하려는 마음이 쌓임은 왜 그럴까요? 의무감과 해치움이 앞서다가 결국

     미사 마저 참례하지 않게 되고 냉담의 경우로 변질 됨은 왜일까요? 이것 복잡해지는 문제라 보여집니다.

     모세가 아론형의 도움으로 내 마음의 에집트에 갇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 대행하듯 간교한 작은 뱀으로

     변모시키는 그들의 지팡이를 구리뱀의 지팡이로써 퇴치하듯 어둠의 사고를 규명하기 이전에 먼저 빛의

     사고를 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무지하고 죄많고 미천한 우리이기에 가톨릭 신앙의 중심이 미사임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본당에서는 신자들을 위하여 날마다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미사 참례가 따르지 않는 사도직은 있을 수 없습니다.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협조자인 우리가 자신의 작은 희생을 더하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희생과 모든 이의 죄와 본당의 소망을 모두 모아서, 제대앞에 쌓아 놓읍시다.

     그러면 주님의 희생이 바로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도적 열성이 주님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느껴질 것입니다.

     사제와 하나 되고, 교회와 하나 되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미사에 참례합시다.

 

  6. 고해성사 요건 중 결심(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을 '정개'라 합니다)부분에 확신이 없는

     이유는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회가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개선 방법은 간단합니다.

     성찰을 다시 시도하면 됩니다. 본프레레나 베어벡같은 옹졸한 고집이거나 미지근한 감독이 아닌 히딩크

     처럼 카리스마를 가지고 또한 자신감을 가지고 당시의 냄비 언론처럼 들끓는 나의 비난들을 즐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용기 잃지 말고 이것들도 자꾸 내려 놓으시면 됩니다. 이것이 봉헌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계속 몸을 깨

     끗이 하듯 몸과 마음의 그것을 정화하고 용서해 주시는 주님께 내어 맡기면 됩니다. 그래서 나 스스로의 맞

     춤형 기도의 약정 등도 필요한 것입니다. 자칫 연목구어로 이어지기 쉽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빨랑까(지렛대)라고도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부터 본당 성체조배 10번을 스스로에게 지켜

     질수 있는 범위내에서 약정해 보세요.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당연히 같은 죄로 고해성사를 반복 했을때 혼돈도 혼돈이지만 양심의 가책만을 자꾸 얽매이다 보면 불가에

     서도 칭하는 무관지옥까지 떨어질 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는

     성경에 거듭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

     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

     에게까지도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라는 사랑의 병원을 세우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참회하고 우리 입을 통해 들으시는 하느님께서는 오늘 이 귀중한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에 파멸을 경험한다는 것도 일정기간(?) 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라 생각 하게 하는것도

     모두 주님 대전에 올리는 자세가 선행됨으로써, 정신이 산란할 수록 용기 잃치않고 먼저 그것을 버리고

     조용히 기도 나누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지요. 이 때에 미사를 쉬려는 사고가 아닌 시끄러운 내면의 내가

     먼저 쉬는 자세가 필요한 것인데 질문하신 형제께서 쉬고프다는 의도가 잘못 전달 되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습과 부마...등 여러 말씀들도 주님을 믿고 닮고 따르기 위하여 우리가 봉헌하는 것이지만

     기초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질문하신 형제께서 애당초 부실한 자신의 한계라며 고백하기 훨씬 이전부터

     애당초의 우리가 하느님의 걸작품임을 믿고 그대로 따르려 함에 감사드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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