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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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 [goodactor] 쪽지 캡슐

2023-11-15 ㅣ No.229724

사람이 어떨 때 최선을 다하는지 하느님은 잘 압니다

사람들도 같은 사람들에게 그 최선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들 있습니다
쉽게 말해 사람들이 개나 물개, 돌고래들을 훈련시킬 때 쓰는 방식을 연상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그 방식을 압니다
같은 사람들에게도 말입니다
보상과 댓가가 없다면 사람들에겐 일이 재미없을 겁니다
재능이 탁월하면 세상이 알아 봐 줘야 하고 그에 걸맞는 세상의 모양과 모습으로 꾸며줘야 제대로 할 맛이 납니다
그게 나쁠가, 좋을까를 따지기 이 전에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능력향상을 위해 인간성을 길들여 왔던 관습과 제도를 아우르는 방식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능력향상은 곧 문명과 사회의 발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모멘텀이기에 모두들 자부할 수 있고 내세울 수 있는 능력의 성취를 선으로 지향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세상에 온 예수의 최선을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무엇이 그 사람의 삶을 충만하게 했고 충분하게 했으며 그토록 최선을 다하게 만들었는지 말입니다
스스로가 말했듯 머리 뉘일 곳도 없이, 외투 하나만 걸치고, 그리고 인간들 모두가 군중의 지지와 환호, 대중적 인기와  열광 앞에서 그에 걸맞는 세상의 모양과 모습으로 자기자신들을 꾸미기에 애쓰고 힘쓰며 바빴던 것과는 달리, 모두가 그렇게 떴다하면 자신의 자격과 위상을 볼 만하게 치장하고 보다 차별화된 격상으로 드높였어야 할 삶의 모든 자리와 결정적 판도 앞에서도 새끼나귀를 타고 하느님 앞에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으로 모두 앞에 나섰던 그런 사람을, 그 사람의 최선을 말입니다
성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죽어야 할 이유는 선악과 때문이 아닙니다
모두가 마약중독자와 알콜중독자로 죽는 건 아니니 말입니다
모두가 담배를 피우며 스스로를 썩어 문드러지게 만드는 건 아니니 말입니다
사람들이 죽어야 할 이유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명백해지는 사실을 안다는 건 비극이고 슬픔입니다
어쩔 수 없는 진실 앞에 마주서면 침묵하게 되고 삶이 숙연해집니다
신명기를 한 번 보았습니까
참으로 많은 문장들의 끝이 죽어야 한다라는 종지부로 되어 있습니다
한 처음의 죽을 것이다라는 가정이 아니라 죽어야 한다라는 명제로 분명히 씌여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그렇게 죽이고 싶어하는 분이실까요
하느님은 그렇게 사람들에 대한 적의와 살의가 충만한 존재일까요
예수는 그 모든 것의 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의 삶에 가장 큰 의의는 바로 하느님에 대한 진실입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에게도가 아닌 그 모든 것의 진실 말입니다
예수와 사람들을 비교한다는 건 무리입니다
프란치스코 당대의 Pope(나는 동양권에서 번역된 교황이란 말을 지극히 싫어합니다)였던 인노첸시오는 그런 사실을 직격했습니다
복음은 인간들에게 무리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보다 인간들의 전제와 조건에 몰두하고 몰입했던 카톨릭 교회는 1000년도 안되어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A.D 300년경부터 로마제국 치하에서 신앙생활을 해도 되는 종교로 공식인정되었으므로)
복음은 분명히 율법을 완성합니다
분명합니다
복음은 율법을 폐지하고 나름의 법도와 법통과 법률과 법치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분명히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신명기도 말입니다
복음의 지향성은 율법의 완성에도 있고 이를 통한 사람의 구원은 가장 바람직한 복음의 길입니다
타자와 타력에 의한 구원은 항상 진리의 진실에 대한 공공연한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게 의미와 가치가 있냐는 식으로 말입니다
영화에서도 데우스 마키나는 시시한 결말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들은 예수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더 혼란스럽게 나돕니다
가짜 뉴스보다도 더하게 진리에 대한 오류성 짙은 의문투성이의 논란을 가중시킵니다
그리고 누구를 탓하고 그 사실들의 타겟이 누구들이 되느냐 하면은 말을 안해도 될 겁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마하트마(위대한 영혼) 간디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은지도 꽤 오래된 인물입니다
그런 간디는 생존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따라 산다면(복음대로 산다면) 인도땅에는(간디는 현재 인구 14억인 인도에서 태어난 인도사람이었습니다) 힌두교도들(인도인들은 기원전부터 힌두교를 믿어 왔고 현재 14억 인구의 80%가 이 종교의 신도들입니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간디는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요
무엇보다도 간디는 복음의 실체적 진실을 어느 정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았던 거지요. 그리스도인들을 말입니다
너무나도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신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간디가 몰랐던 진실은 바로 그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또한 복음을 분명히 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자의적, 자체적, 자구적 진실만을 가지는 진리가 아니라 구약과 함께 신약으로 united되고 통합된 성경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가 과대포장되지 않고 마치 자비가 모든 율법을 폐지하며 지 성질만을 지 세상에서 관철시키는 표제와 모멘텀으로 꾸며져 있지 않습니다
사는 게 좋은 걸 알고, 세상의 좋은 걸 많이 가지고 살았던 부자청년은 당연히 그렇게 영원히 살고픈 욕망마저 이루고 싶어 예수를 찾아 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히 지금처럼 오래 살 수 있는 지, 이 세상만큼의, 이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묻습니다
기특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재력가들은 노인네가 되어갈수록 생에 대한 애착과 탐착으로 온 동네방네 영생의 명약을 찾으러 다니거나 그 방법을 알고 싶어 안달을 내며 그 끝에 이르러 가는데 이 부자청년은 나름 현명하게도 예수를 찾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부픈 꿈도 여기까지입니다
예수는 냉철하게 그 진실을 말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먼저 계명을 지키라고 합니다
부자청년이 잘 지키고 있다고 반색을 합니다
예수는 부자청년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그럼 니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라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부자청년은 실망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며 예수 앞에서 물러납니다
생명은 현재성에 살아있습니다
나중에, 먼 훗날에 두 손에 거머쥘 수는 없는 겁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지금 이곳에 언제나 생명은 살아있습니다
부자청년은 멀리 내다 봤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향유하는 삶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간디가 몰랐던 사실이 바로 그런 복음의 진실입니다
예 하겠다고 하면서 안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예 하지 않았지만 예 한 사람들보다 더 예 한 것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실의 진심과 진위는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생명은 결코 사람들이 나중에라도 거머쥘 수 없는 진실임을 뚜렷이 표현합니다
어떻게 보면 카톨릭이 사후교리로 표방하는 최후의 심판날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해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는 단테의 신곡에서처럼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는데 성경도 그곳이 땅속, 지하라고 하니 말입니다
상상이 어렵지 않습니다
영원한 지옥불에서 끝없이 머물러야 하는 것들도 있다는 건 경고와 협박이 아닐 겁니다
왜 그러겠습니다
왜 그런 실없는 말을 하겠습니까
세계에 대한 상상조차도 인간지성의 수준을 넘어섭니다
하느님은 사디스트입니까
아니면 사이코패스입니까
모든 현상들은 언제나 진리의 심연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사람을 죽도록 만든 건 하느님이 아니지만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게 만든 건 하느님입니다
이 차이가 바로 진실로부터의 모든 사실들이 있게 합니다
고통은 이미 대명사가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실도 언제나 끝이 없습니다
그 끝을 이제 보고 싶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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